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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사적 제155호)

■창덕궁昌德宮(사적 제155호)


  창덕궁은 처음에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으나,

임진 왜란 때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소실되고

고종 때 복구될 때 까지 약 300여년간 열 세 분의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政事를 봄으로써 본궁의 구실을 하였다.


  이 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관대궐東關大闕󰡑 또는

󰡐동관東闕󰡑이라고 불렀다.


  창덕궁이 창건된 것은 조선 초기에 한양천도漢陽遷都가 있던 때로

태종이 즉위하여 도성都城을 한양漢陽으로 다시 옮기면서

동시에 이궁離宮의 조성을 명하여 태종 5년(1405년)에 완공하였다.

이 때 도성에는 이미 종묘宗廟 ・ 사직社稷과 더불어

정궁正宮 경복궁이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이 궁의 조성은

하나의 별궁別宮을 도성 내에 두기 위하여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태종 12년(1412년) 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비로서 세워지게 되었다.

세조가 즉위하고서는 정전正殿인 인정전仁政殿을 다시 짓고

궁내의 각 건물의 명칭을 고쳤는데,

이 때 고쳐진 전각들의 명칭은 대체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창덕궁은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이 남향하여 있고,

이 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꺾여

금천교錦川橋라는 다리를 건너면 진선문進善門에 이르고,

이 문을 지나 다시 왼쪽으로 꺾여 정전正殿의 출입문인 인정문仁政門이 나타나며,

진선문과 인정문 주변은 사방이 모두 행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조선 초기에는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정사를 보았으므로 크게 이용되지 않았으나,

성종이 즉위하여 왕이 창덕궁에 머물면서 정사를 보는 일이 많아졌으며,

특히 연산군은 재위 중 주로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은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는데, 

이 때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 궁궐이 모두 불타버렸다.


  그 후 세 궁궐 중 창덕궁이 가장 먼저 복구에 착수되어 광해군 1년(1609년)에 중건되었으며,

곧 이어 창경궁도 복구되었지만 경복궁만은 방치되었다가

고종 4년(1867년)에 가서야 중건되었다.


  따라서 창덕궁은 조선 후기의 정궁으로서 구실을 하게 됨에 따라

은 나라의 큰 사건에 휘말리거나 부주의 등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화재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창덕궁의 후원後苑은 일명 금원禁苑 또는 비원秘苑으로 불리는데,

동쪽으로는 창경궁과 이어져 있어 실제로는

창덕궁과 창경궁 두 궁궐의 원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산세 지형을 이용하여 

연못을 조성하고 정자를 꾸며

역대 왕들이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 으므로

수시로 이 후원에 들러 휴식을 취하였다.


  창덕궁 인정전仁政殿(국보 제225호)조선 후기의 법궁으로서

왕실의 각종 의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이 이 건물에서 이루어 졌으며,

인정전의 전정前庭에는 품계석이 마련되어 있다.

  창덕궁 대조전大造殿(보물 제816호)

왕과 왕비의 침실로 사용 되어진 가장 으뜸가는 내전內殿으로서

지붕에는 용마루를 두지 않았는데,

이는 왕을 용으로 상징화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1912년 일본은 창경궁과 함께 창덕궁을 일반에게 관람하도록 하여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을 실추시키기도 하였으며,

광복 후 창덕궁은 시민에게 개방되어

 1980년에는 그동안 훼손되었던 궁내 시설을 정비하고

궁의 관람을 제한하여 옛 궁궐의 면모를 지켜 나가고 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