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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엔 끝이없다.^^*/아는것이 힘

 


  은 우리가 먹는 음식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주식인 쌀 ・ 보리 등의 곡물을 익혀 먹는 음식을 말한다.


  은 한자어로 반이라 하고, 어른에게는 진지, 왕이나 왕비 등 왕실의 어른에게는 수라, 제사에는 또는 젯메라 한다.


  이를 먹는 표현도 수라는󰡐진어하신다.󰡑, 진지는 󰡐잡수신다.󰡑, 밥은󰡐먹는다.󰡑는 등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먹는 대상에
따른 표현이 다양한 것은 일상적이고 기본이 되는 것에서 삶을 가르치던 우리 조상들의 의식구조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래 전 옛날에는 토기에 곡물과 물을 넣고 가열하는 방법을 취한 것으로 여겨지며, 그 후 시루가 생겨남에 따라 곡물을 찌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안악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음식을 시루에 찌고 있는 주방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뒤 무쇠로 만든 솥이 보급됨에 따라 지금의 밥과 같은 조리법이 개발되게 되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대무신왕 4년조에는 정鼎(솥) 炊 (밥을 지음)두 자가 기록되어 있고, 신라의 고분에서도 쇠로 만든 가마솥이 많이 출토되고 있으므로, 이 때 부터 곡물을 쪄서  밥을 짓는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발달된 밥 짓기는 일본에도 전하여졌고, 중국에서도 유명하게 되었다. 청나라 때 장영張英은「반유십이합설飯有十二 合說」에서 󰡒조선 사람들은 밥짓기를 잘한다. 밥알에서 윤기가 있고 부드러우며 향긋하고 또 솥 속의 밥이 고루 익어 기름지다.  밥 짓는 불은 약한 것이 좋고 물은 적어야 한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아무렇게나 밥을 짓는다는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물건을 낭비하는 결과가 된다.󰡓고 우리나라의 밥 짓는 법을 칭찬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반상飯床이라는 고유한 식문화를 형성 하여 각종 문헌에 밥 짓기의 요령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19세기 초엽 서유구가 지은「옹희잡지」에서는󰡒우리나라의 밥 짓기는 천하에 이름난 것이다. 밥 짓는 것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쌀을 정히 씻어 뜨물을 말끔히 따라 버리고 솥에 넣고 새 물을 붓되, 물이 위로 한 손바닥 두께쯤 오르게 붓고 불을 때는데, 무르게 하려면 익을 때쯤 한번 불을 물렸다가 1,2경 뒤에 다시 때며, 단단하게 하려면 불을 꺼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만화慢火 (뭉근한 불)로 땐다.󰡓고 하였다.


  의 종류 중 가장 대표적인 잡곡밥은 보리밥이었고, 완두콩밥 ・ 조밥 ・ 팥밥 ・ 수수밥・ 기장밥 등을 철 따라 먹어왔다.


  특별히 산모産母에게 주는 밥은 특별한 관습이 전해 왔으며, 출산 전에 산모의 밥을 짓기 위하여 미리 좋은 쌀을 준비하는데, 이를 산미産米라 한다.


  산미는 뉘와 싸레기를 골라서 한 말 가량을 새 자루에 담아 깨끗한 곳에 두며, 산곽産藿(산모가 먹을 미역)도 길고 넓고 좋은 것을 사서 꺽지 않고 두었다.


  산기産氣가 있으면 깨끗한 상에 쌀을 한 되 가량 퍼내서 수북이 놓고 그 위에 산곽을 길게 걸치고 정화수 세 대접을 놓는데,

이 상차림을 삼신상三神床 또는 산신상産神床이라 하여 안산安産 비는 것이다.


  안산을 하고 나면 이 산미로 흰밥을 지어 세 사발을 떠올리고, 산곽도 고기를 넣지 않은 미역국으로 끓여 세 사발을 올리고, 정화수도 세 대접을 떠놓고 감사하는 기도를 올린다. 그 다음 산모에게 삼신상三神床을 내려서 먹이고 해산구완을 하는 사람도 먹는다.


  또한, 혼인을 하면 신부가 신랑・신부의 밥그릇과 수저를 혼수로 가져오는데, 이것은 밥을 잘 받아먹고 해로偕老하기를 바란다는 의미였다. 󰡐이 보약이다.󰡑라는 속담과 같이 밥을 잘 먹어야 건강하게 해로할 수 있다는 소박한 믿음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을 뜬 후에도 소상・대상을 지낼 때까지 이 밥그릇에 아침저녁으로 생전과 똑같이 밥을 담아 상식上食으로 올리는 것이 관례였다.


  특히, 정월 대보름날에는 찹쌀 ・ 찰수수 ・ 차조 ・ 콩 ・ 팥 잡곡을 넣어 오곡밥을 지어 먹었는데, 이는 모든 곡식이 풍년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 담긴 풍속이었으며, 그리고 다른 을 가진 집의 밥을 세 집 이상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하여 오곡밥을 서로 나누어 먹는 풍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