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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영주 관광

퇴계가 얻고자 한 감동 저 능선 끝 어디쯤 있을까… ‘퇴계 등산로’2012.01.04 22:11

퇴계가 얻고자 한 감동 저 능선 끝 어디쯤 있을까… ‘퇴계 등산로’
  • 2012.01.04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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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를 병풍처럼 포근하게 감싼 소백산(小白山)은 산세가 웅장하면서도 부드러워 ‘어머니의 산’으로 불린다.

조선시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병란을 피하는 데는 태백산과 소백산이 제일 좋은 지역이다”고 했고, ‘정감록’ 등은 소백산 자락의 금계촌을 흉년·전염병·전란이 없는 십승지의 으뜸으로 꼽았다. 예언서 ‘격암유록’의 저자 남사고가 소백산 옆을 지나가다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며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활인산(活人山)이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퇴계 이황(1501∼1570)이 풍기군수 시절인 1549년 4월에 소백산을 유람하고 ‘유소백산록’을 남긴 것도 이런 맥락이다. 영주와 풍기 사이를 자주 오갔던 퇴계에게 소백산은 머리만 들면 보이고 발만 옮기면 오를 수 있는 이웃이었다. 그러나 40년 동안 마음속으로 그리기만 하던 퇴계는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비로소 그 뜻을 이루게 됐다.

철쭉꽃이 만개한 봄날에 백운동서원(소수서원)에서 유생들과 하룻밤을 보낸 퇴계는 곳곳에서 맑은 계류가 돌에 부딪쳐 흐르는 소리가 청아한 죽계구곡을 거슬러 올랐다. 죽계구곡은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인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의 배경. 초암사 앞의 제1곡을 시작으로 영주 순흥면 배점리의 삼괴정 근처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 2㎞를 흐르는 죽계구곡은 소백산 자락길이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별빛을 등불 삼고 얼음 속을 흐르는 죽계구곡의 물소리와 산새소리를 벗 삼아 초암사를 지나자 등산로가 두 갈래로 나눠진다. 왼쪽은 달밭골을 거쳐 소백산 주봉인 비로봉(1439.5m)을 오르는 산길이고, 오른쪽은 석륜암터를 거쳐 국망봉(1420.8m)에 오르는 등산로이다. 퇴계는 이곳에서 오른쪽 등산로를 택했다. 눈이 무릎 깊이로 쌓이고 빙판이 교차하는 등산로는 자칫 한 발이라도 헛디디면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질 것 같아 오금이 저린다.

퇴계는 이곳에서 두 사람이 앞뒤에서 메는 견여를 타고 국망봉 아래에 위치한 석륜암에 올라 하룻밤을 보냈다. 지금은 암자의 흔적조차 사라진 석륜암터에는 기이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봉황 형상을 해 봉바위(봉두암)로 불리는 18m 높이의 기암괴석으로, 꼭대기에는 신기하게도 소나무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소백산 낙동강발원지 비석이 세워진 석륜암터에서 등산로는 다시 두 갈래로 나눠진다. 왼쪽 길은 퇴계가 견여에서 내려 사닥다리를 타고 바위에 올랐던 등산로로 험준하기로 이름 높다. 퇴계가 유소백산록에서 “산길을 곧바로 올라가자니 마치 사람이 절벽에 매달린 것 같았다. 우리는 힘을 다하여 당기고 밀고 한 뒤에 산마루에 올라갔다”고 기록했을 정도.

하지만 퇴계가 올랐던 등산로는 1970년대에 봉바위 뒤편 등산로가 개설되면서 폐쇄되고 석륜암을 비롯해 주변에 흩어져 있던 암자와 암자터는 공비토벌 작전인 ‘견벽청야 작전’으로 사라졌다. ‘퇴계 등산로’를 찾기 위해 동행한 소백산구조대장 임진태씨는 “70년대 초까지 퇴계 등산로 주변에 허물어진 암자가 몇 채 있었지만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모두 철거됐다”고 아쉬워했다.

퇴계 등산로와 헤어져 봉바위 오른쪽 나무계단을 오른다. 100m쯤 전진하자 길섶에서 돼지 한 마리가 튀어나와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자세히 보니 거대한 돼지가 웃고 있는 형상의 바위로 새해 첫날에는 이 돼지바위에 소원을 빌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선다고 한다.

돼지바위에서 국망봉 아래에 위치한 능선까지는 나무계단의 연속. 하늘을 가린 참나무 숲 나목 사이로 설산으로 변한 비로봉이 숨바꼭질을 한다. 석륜암계곡의 갈색 나목은 아침햇살에 붉게 물들고 원적봉을 비롯한 소백산 남동쪽의 산들은 중중첩첩 수묵화를 그린다.

드디어 비로봉을 비롯해 국망봉 등 소백산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름 없는 능선 위에 섰다. 설화와 상고대로 단장한 철쭉나무 군락이 끝없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바위봉우리인 국망봉이 쪽빛 하늘 아래에서 설산으로 변한 백두대간을 굽어보고 있다. 국망봉은 신라 마의태자가 엄동설한에 올라 옛 도읍 경주쪽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조선시대에는 배순이 선조가 승하하자 3년 동안 국망봉에 올라 한양을 향해 곡을 했다고 한다. 배순은 본래 대장장이로 틈날 때마다 소수서원에 들러 퇴계의 강의를 문밖에서 듣자 퇴계가 제자로 삼았다는 일화가 전해오는 인물. 배점리라는 지명도 배순의 무쇠점(대장간)에서 비롯됐다.

영주와 충북 단양의 경계인 국망봉은 비로봉과 상월봉 등 소백산 연봉은 물론 백두대간 능선을 중심으로 영주와 단양의 산줄기들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곳. 국망봉에서 비로봉까지는 능선을 따라 3.1㎞로 자개봉과 석름봉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바위봉우리를 지나면 퇴계가 밀고 당기며 올랐다는 산마루가 나온다.

국망봉에서 비로봉 사이의 단양 쪽 북서사면은 어른 키보다 큰 철쭉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칼바람에 날려온 눈보라가 철쭉 가지에 칼날처럼 붙어 있고, 응달이라 한낮까지 상고대가 피어 마치 산호가 군락을 이룬 남태평양 바다 속을 걷는 느낌이다.

퇴계는 울긋불긋한 철쭉이 만개한 능선이 비단으로 만든 장막 같다고 감탄했다. 호사스런 잔칫집에 온 듯한 기분에 퇴계는 술을 서너 잔씩 나눈 뒤에 시 일곱 수를 지었다. 그리고 날이 저물자 철쭉 숲을 빠져나와 비로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능선에서 달밭계곡을 통해 하산했다. 흥에 취한 퇴계는 하산하면서 기암괴석과 산봉우리들에 선심 쓰듯 하나하나 이름을 지어줬다. 이곳도 폐쇄된 등산로로, 길은 끊어질 듯 가파르고 낭떠러지는 내려다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찔하다. 하지만 나목 사이로 보이는 계곡미는 계절만 다를 뿐 퇴계가 기록한 풍경과 다름없다.

퇴계는 유소백산록에서 영남의 선비들이 소백산 유산록을 남기지 않았다고 안타까워했다. 백운동서원을 세운 주세붕이 유산록을 남기기는 했지만 직접 정상에 오르지 않고 산을 오른 사람들에게 물어서 쓴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러면서 퇴계는 훗날 이 유산록을 읽는 사람이 자신처럼 감동받기를 소망했다.

몸이 허약한 퇴계가 온갖 고생을 무릅쓰고 직접 소백산을 올라 얻고자 했던 감동은 무엇일까. 유홍준씨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하찮아 보이는 마른 가지의 부석사 사과나무에서 무한대의 사랑을 느꼈다고 고백했듯이 아무도 찾지 않는 460여 년 전 등산로를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퇴계의 감동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영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