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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영주 관광

두레골 성황당

두레골 성황당 

  

 



 두레골 성황당의 유래는 보기 드문 전설을 가지고 있다.

원래 현재와 같은 성황당이 서기 전에는 순흥부의 수호신으로 믿어 

온 산신령만을 모시는 산신각이 먼 옛날부터 있어 왔었다.



 그러다가 주신인 금성대군의 신위를 모시게 되어 

오늘날까지 순흥 사람들의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굳혀져 오고 있다. 

성황당의 주신인 금성대군을 모시게 된 연유는 대개 다음과 같다.



 조선조 초기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형식으로 왕위를 물려 주고 

상왕으로 있다가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주동이 되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의 배반으로 발각되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 되었고, 

세조의 동생인 금성대군은 순흥부에 유배되었다.



 그 해 가을에 금성대군(이유)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사전에 탄로나 노산군은 서인이 되고, 

같은 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물론 금성대군도 죽음을 당하였고, 

순흥부는 폐부되었다.



 그 후 227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 숙종9년(1683)에 순흥부가 복설되었고, 

금성단이 설치되어 봄.가을로 제향을 드리게 되었다.



 어느날 이 고을의 이선달이라는 사람의 조부가 꿈을 꾸었는데,

금성대군이 꿈에서 

"내가 흘린 피 묻은 돌이 순흥면 죽동거랑가에 있으니 나를 거기다가 묻어 달라"

고 하였으므로 하도 신기하여 동네 사람들과 함께 그 곳에 가서 물속을 들여다 보니,

 과연 돌이 있었고 거기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그 소문은 관아에 전해져 부사는 그 돌을 가까운 죽동 불바위 성황당에 옮기고 

매년 소 한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 주었다.



 일제시대때 일본사람들이 들어와 

그 곳에다 침을 뱉고 제를 지내는 것을 미신이라 하여 못하도록 하였는데, 

어느날 금성대군이 현몽하기를 

"나를 두레골에서 제사를 지내 달라"고 했다. 

이리하여 성금을 거두어 산신령만을 모시던 두레골에다 

성황당과 산신당을 새로 건립하게 하였다.

유 래 : 순흥부의 산신령만 모시던 산신각이 있던 자리에 지금의 두레골 성황당이 선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초기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모의하다 순흥부에 유배되었다. 그후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다시 단종복위를 모의하다 탄로나서 끝내 단종은 죽음을 당하고 금성대군 또한 사사되었고, 순흥부는 폐지되고 많은 부민들이 살육되었다. 그후 숙종9년에 순흥부가 복설된 후 이고을 이선달이란 사람의 조부의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나의 피묻은 돌이 순흥면 죽동 거랑가에 있으니 거기에 제사를 지내달라 하였는데, 과연 그곳에 피묻은 돌이 있어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런데 구한말 일본인이 들어와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였는데 다시 금성대군이 꿈에 나타나 두레골에서 제사를 지내달다라 하였다. 이리하여 산신각만 모시던 두레골에서 피묻은 돌을 봉안하고 금성대군을 신위로 모신 성황당과 산신을 위한 산신당을 새로 건립하였다. 현재까지 초군청에 의해 매년 정월 13∼15일에 제가 올려지며, 제사를 며칠 앞두고 장에서 소를 구하여 그 제물소를 극진히 모신다. 제관은 정월 초사흘부터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찬물로 목욕재계하며 13일 낮에 비봉산 본당고사를 지내고, 14일 조반후 소를 잡고, 먼저 산신당에 고사지내며 콩팥, 간, 골, 염통등은 성황당에, 뒷발은 산신당에 올린다. 제는 15일 자정에 지내며 제를 마친후 마을로 돌아와 마을사람들과 의논하며 음복하는 마을의 화합을 다지는 축제로 마무리한다.
  형태,방법,업적 : ◈ 순흥 문화마을의 향수와 옛날 순흥도호부 의 정신을 접할 수 있는 문화축제. 경북 영주시 관내의 전통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깃들인 마을 순흥에서 벌어진다.
◈ 동서부 줄다리기, 전통농악, 두레골 성황제 등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