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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려준 자연의 혜택 청량산

하늘이 내려준 자연의 혜택 청량산

영주시  문화관광해설사  권  화  자


경상북도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도처에 산악이 중첩하고 구릉의 기복이 심한 이곳 봉화군은, 산세가 수려하고 선비의 정신이 깃든 예절의 고장입니다.

전체면적의 83%가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산림으로 이루어져 있어, 경관이 빼어나고 송이버섯을 비롯한 특산물이 많으며, 영암의 월출산, 청송의 주왕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악(奇嶽)으로 널리 알려져, 소금강이라 불릴 정도의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청량산을 한번 둘러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청량산 열두 봉우리

청량산은 옛 부터 불교의 흔적이 산 전체에 남아 있던 곳입니다.

이러다 보니 청량산의 봉우리들도 그 명칭이 보살봉, 의상봉, 반야봉, 문수봉, 원효봉 등과 같이 불교식 명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544년(중종 39) 당시 풍기군수이던 주세붕이 청량산을 찾아 열두 봉우리의 이름을 일부 고치고 새로 짓기도 하였는데, 그 명칭이 지금의 열두 봉우리의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자가 여산(廬山)을 명명한 전례에 따라 주세붕이 청량산을 명명한 것입니다.

이후 퇴계는 주세붕이 명명한 열두 봉을 인정하면서 이를 '청량산 육육봉' 이라 부르며, 주자의 무이산 육육봉과 연결시켜, 청량산을 조선의 무이산으로 삼았습니다.

이때부터 청량산은 불가의 산에서 유가의 산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 봉우리들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 .해가 정상의 한 가운데서 뜨므로 동방에 해가 떠서 빛난다는  뜻을 취(取)하여 이름붙인 '경일봉'.

* . 옛 날에는 치원봉(致遠峰)이라고 불리었던 ‘금탑봉’.

* . 그 모양이 마치 신비로운 새가 춤을 추는 것 같아서 붙여진 ‘자란봉’.

* . 탁립봉(卓立峰)

* .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고 하며, 가뭄이 들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영험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자소봉(845m)

* . 봉우리 전체가 뾰족한 돌 봉우리의 빼어난 형상이 붓끝을 모아 놓은 것과 같아서 이름 붙여진 탁필봉(卓筆峯, 820m)

* . 정상이 조금 평평한 것이 흡사 연적(硯滴)과 같다고 하여 이름붙여진 연적봉(硯滴峯, 850m)

 * . 옛날의 명칭은 '의상봉'이었는데 암벽(巖壁)의 층으로 된 것이 처음 피어나는 연꽃과 같다하여 주세붕이 개명한 연화봉(蓮花峯, 876m)

* . 모양이 향로와 같다 하여 그 형상을 따서 이름을 지은 향로봉(香爐峯)

* . 청량산의 여러 봉(峰) 중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중국의 오악(五嶽)의 하나인 남악형산(南嶽衡山)의 이름을 모방하여 지은 축융봉(祝融峯, 845.2m)

* . 청량산의 가장 높은 주봉(主峰)으로서 옛날의 명칭은'대봉(大峰)'이었던 의상봉(義湘峰,  870.4m) = 장인봉(丈人峯)

* . 산모양이 마치 학이 공중으로 날아 솟구치는 듯하여 이릅 지어진 선학봉(仙鶴峰 821m) 등이 있습니다.


2. 청량산의 대(臺)

 청량산에는 열두 봉우리와 함께 대(臺)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이 중 최치원의 유적으로는 독서대(풍혈대)치원대, 난가대가 있고 의상 대사의 의상대, 원효 대사의 원효대, 공민왕의 밀성대, 주세붕의 경유대 등이 유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중 어풍대가 옛 부터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어풍대에서 내산을 바라보면 산은 연꽃이고 청량사는 꽃술로 보입니다.

이 밖에도 청량산 곳곳에는 학소대(鶴巢臺), 금강대(金剛臺), 만월대(滿月臺), 청풍대(淸風臺), 치원대(致遠臺), 반야대(般若臺), 경유대(景遊臺), 화암대(華岩臺)를 비롯하여 그 외에도 최치원을 위하여 밥을 지어 주던 노파의 소상을 모신 곳인 안중암(安中庵) 있고 앞에는 채하대(彩霞臺), 자비대(慈悲臺)가 있고 송풍대(送風臺), 요초대(瑤草臺)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택지리》에 보면 “난가대(爛柯臺)는 최치원이 바둑 두던 곳으로 모난 돌에 바둑판 줄이 그어진 듯하다”고 전해집니다.


3. 청량산의 산성(山城) 

청량산에는 산성의 흔적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는데

내성인 산성, 외성인 청량산성, 그리고 이 두 산성을 연결하는 오마도가 그것입니다.

산성(山城)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왔을 때 축조(築造)된 것으로 보이며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능선위에 쌓은 것으로 사람이 거주할 만한 비교적 평지에 쌓은 내성(內城)입니다.

 《청량지》와《세종실록지리지》에는

"산성은 둘레 2천2백79보에 걸쳐 있었으며 높고 험했다." 또한

"산성 안에는 우물 7개와 2개의 계곡물이 있어 수천의 군사와 군마를 수용할 수 있다." 고 적고 있어 산성 내에 경작지가 비교적 넓어 사람이 상주하면서 살아갈 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량산성(淸凉山城) 

내성(內城)인 공민왕산성(恭愍王山城)을 방어하기 위한 외성(外城)역할을 하는 산성으로 보이며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협곡을 돌과 흙을 쌓아 연결한 포곡식 산성으로 1595년(선조 28)에 개축되었다는《영가지(永嘉誌)》의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이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청량산 연대사의 옛지도

오마도(五馬道) 

오마도(五馬道)라 불리는 이 산길은 산성(山珹) 서쪽 끝 장대(將臺)가 위치한 곳에서 청량산성(淸凉山城) 동쪽 끝인 탁립봉(卓立峰)에 걸쳐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내성(內城)인 산성과 외성(外城)인 청량산성을 연결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방어의 기능을 겸하고 있어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형태로 평가되면서 성문터와 석성 등의 유구가 남아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는 곳입니다.

《청량지》에서는 "산 능선 주위 40여 리에 돌아가며 길을 만들어

말 다섯 마리가 함께 달릴 만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4. 청량산의 굴(窟)

청량산에는 예로부터 8굴(窟)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명필 김생이 수도하던 김생굴, 의상 대사의 수도처 의상굴,

원효 대사의 수도처 원효굴, 최치원이 공부하던 고운굴 등이 유명합니다.


김생굴(金生窟)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이 이 굴 속에서 10년간 글씨 공부를 하였으며 그가 붓을 씻은 우물이 있어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은 김생의 글씨와 봉녀(逢女)의 길쌈이 서로 겨루던 전설이 어린 곳이기도 합니다.

금강굴(金剛窟)

수십 명이 살아갈 수 있는 넓은 굴이며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고 밖에서는 가히 알지 못하니 은거하기 좋은 곳입니다.

원효굴(元曉窟)ㆍ반야굴(般若窟)ㆍ방장굴(方丈窟)

경치가 그윽하고 한가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반야굴(般若窟)

방장굴(方丈窟)

의상굴(義湘窟)

전해 오기를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비조(鼻祖)인 의상 대사가 입산수도할 때 기거한 곳이라 합니다.

한생굴(邯生窟)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한씨(邯氏) 성을 가진 사람이 이곳에서

수련(修練)했다 하는데 어느 때 사람인지 알 수가 없으나 여러 사람이 앉을 수 이쓴 공간입니다.

고운굴(孤雲窟)=풍혈대

최치원이 이곳에서 독서하였다고 하여 독서굴(讀書窟)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5. 청량산의 우물 및 폭포 

청량산에는 최치원이 마시고 총명해졌다는 총명수와 맑고 담백하기로 명성이 높았던 감로수 등 4곳의 우물과 관청폭포, 청량폭포가 있어 산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⑴ 우물


총명수(聰明水)

물의 양이 항상 일정하며 최치원이 이 물을 마시고

정신이 총명하여졌다고 해서 '총명수'라는 이름이 생겼습니다.

주세붕도 "총명수를 마시고 만월암에 누워 있으면

비록 하찮은 선비라도 신선이 된다."고 총명수를 극찬했습니다.

청량약수(淸凉藥水)

산성(山城)의 입구에 있으므로 일명 '산성약수'라고도 합니다.

이 약수를 마시거나 몸을 씻으면 위장병, 관절염 등에 효험이 있다고 해서 각처의 탐방객이 찾아왔었던 유서깊은 우물이었습니다..

감로수(甘露水)

응진전 옛 암자 뒤에 있으며 층층이 높은 절벽 사이에서 스며 고이는 물이 맑고 담백하여 승려들이 명명한 이름입니다. 지금도 그 맛이 담백하고 고우며 원효 대사가 상청량암에서 수도할 때 마신 물이라 하여 원효정(元曉井)이라고도 합니다.


⑵ 폭포

비 올 때 청량정사(오산당)에서 바라보면 천 길 높은 곳에 흰 물줄기가 쏟아지는 것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김생폭(金生瀑),

인공폭포로서 장관을 이루고 있는 청량폭포,

높이가 13m나 되는 폭포로서 보는 이의 발길을 사로잡는 관청폭포(관창폭포)가 대표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 관청폭포                        △ 청량폭포

6. 청량산과 역사적인 인물


2성이라 불리는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머무르셨고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최치원,

왕희지를 능가하는 서예의 대가 명필 김생

요극일 영랑등 4현의 흔적이 남아있는 유서깊은 현장이며,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안동의 민속놀이 행사로 알려져 있는 놋다리밟기 또한, 이곳 청량산에서 있었던 일을 재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아름답고 수많은 유적을 보유한 청량산은 퇴계가 중년이 넘어서도 찾던 정신의 고향이고, 그의 수많은 제자들이 학문의 성지(聖地)라고 여길 정도로 즐겨 찾던 곳으로, 도산서당을 지을 때 이곳 청량산과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를 두고 끝까지 망설였을 만큼 청량산에 대한 애착과 사랑을 보여 주기도 했던 곳입니다.


7.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청량사


△유리보전 앞의 삼각우총과 삼각우송

빛나던 과거와 아름다운 현재 그리고 희망이 있는 미래를 잇고 있는 청량사에는 많은 전설과 설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삼각우총과 삼각우송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원효 대사가 청량사 창건을 위해 진력을 쏟고 있을 때 하루는 사하촌(寺下村)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논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논에서 일을 하는 농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마침 농부가 뿔이 셋이나 달린 소를 데리고 논을 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뿔 셋 달린 소는 도대체 농부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습니다.

이에 원효 대사가 농부에게 이 소를 시주하여 줄 것을 권유했더니 농부는 흔쾌히 이 뿔 셋 달린 소를 시주했습니다.

이에 원효 대사는 소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신기하게도 이 소는 절에 온 후 고분고분해지더니 청량사를 짓는 데 필요한 재목이며 여러가지 물건들을 밤낮없이 운반하더니 준공을 하루 남겨 놓고 생(生)을 마쳤는데 이 소는 '지장보살'의 화신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원효 스님은 이 소를 지금의 삼각우송 자리에 묻었는데 그곳에서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자라나 후세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삼각우송', 이 소의 무덤을 '삼각우총'이라 불렀습니다.


이 밖에도 이 소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이 전해져 오는 이곳 청량사는 서쪽에서 떠오르는 달을 볼 수가 있는 곳이기도 하며, 하늘과 가장 가까운 다리로서 소원을 빌면 잘 이루어진다고 전해지고 있는 하늘다리는 이미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효자노릇을 하고 있으며,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계절이 되면 어느 음악회에 뒤지지 않고 귀빈석이 따로 없이 모두가 하나되는 아름다운 음악회가 매년 성황리에 치러지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가 적절한...

하늘이 내려준 명승지 청량산 구경 어떠셨나요?

오늘의 이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리하길 바라며, 그 추억에 미소 지으시고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자리 메김 하시길 바랍니다. 


△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사는 한 송이 연꽃 속의 수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