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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수) 왜 하필 부석사?

왜 하필 부석사?

부석사  전영수


 왜 하필 부석사로 가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첫째. 이 절은 완전한 절이니까.

 완전한 절이라면 불, 법, 승 세 가지는 있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불은 부처님의 진신 사리(舍利)이다. 부처님의 진신 사리가 다섯과나 종무소 앞에 있는 탑속에 있다고 비석에 새겨져있다. 때때로 회색 법복을 입은 보살님들이 정성스럽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시계방향으로 탑돌이를 수업이 하는 고즈넉한 모습을 보면 금방이라도 그 여인의 소원을 탑속의 부처님이 들어주실 것 같다.

 둘째로 법은 부처님 말씀 같은 글이 적힌 경판이라 할 것이다. 이절에는 화엄종 사상을 적은 고려 때 만든 경판이 670여장이 장경각 안에 잘 진열되어있다. 그 핵심이 210자로 압축되어 화엄일승법계도로 만들어져있는데 이것만 잘 숙고하고 실천해보아도 금방 득도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중 한두 줄 소개하면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여럿 가운데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일체요 多가 곧 일이다.’ 라는 글귀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 꼭 필요한 사상일 것이고 어느 나라에나 단결하고 협동하는데 꼭 필요한 사상이라고 생각되고 ‘비 같은 보물이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우는 중생이 그릇을 따라 이익을 얻는다.’는 글귀는 복되고 잘살기를 원하는 모든 중생들에게 넓은 마음을 가져야한다는 참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셋째로 훌륭한 스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겠다. 고려 때에는 이절에 스님이 3천명이나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숭유억불정책 때문에 많이 줄어서 지금은 하안거나 동안거 때에는 한 이십 명, 그 기간이 지나면 한 오륙 명이 계시는데 한 삼사년만 지나면 한 두 분씩 다른 절에 주지스님으로 떠나가셔서 자주 못 만나게 되어 아쉽다. 큰스님은 우선 그 모습이 사천왕 문에 네 분을 다 합쳐 놓은 것 같아 때로는 친절 다감하시고 때로는 무서운 분 같기도 하다. 그분을 만나면 강도도 회계하여 돌아서고 걸인도 감동받고 돌아가고 술주정뱅이도 정신 차리고 돌아간다고 한다. 그분 말씀 또한 감동적이어서 여러 나라 사람들이 경청한다고 한다. 어떤 총무스님은 친절하셔서 한번은 외국인이 해우소에 빠트린 안경을 손수 긴 장대로  건져 비눗물로 여러 번 씻어 주셨다고 하니 매우 훌륭한 분으로 생각된다. 이런 분들과 차를 가운데 놓고 만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이 절에는 극락이 있다.

 단풍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보리수나무, 매화 사이로 수많은 계단 약 백팔계단을 올라올 때는 백팔번뇌를 겪는 것처럼 힘들지만, 그 마지막에는 안양루 마루를 통과하게 되는데 이 안양이라는 것이 곧 극락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을 올라오면 금방 천년을 훌쩍 넘게 기다려 오고 견뎌온 예쁜 보살이 새겨진 석등을 만나게 되고 고색창연한 본전 무량수전이 정면으로 다가온다.

 또한 그 왼쪽에는 큼지막한 뜬 돌이 엎드려 있고, 그 오른쪽에는 예쁜 선묘 낭자 모습이 담겨져 있는 선묘각이 미남 스님 의상 대사를 반기듯이 서있으며 그 옆에는 또 하나의 삼층탑이 아름다운 자태를 지키고 서있다.

 이 광경에 반해서 최순우 교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을 그리면서 좋은 책을 썼고 방랑시인 김삿갓은 안양루 앞을 바라보면서 좋은 글귀를 남겼고, 그 글귀가 현재 안양루 서편 벽에 걸려있다.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 난 곳 못 왔더니

백발 다된 오늘에야 얀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펼쳐있고

천지는 부평 같아 밤낮으로 떠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오듯

우주 간에 이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인간 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 보겠는가

세월이 무정하네 나는 벌써 늙어있네

                                          김삿갓 『안양루에서』


셋째. 이 절에는 아름다운 Love Story가 있다.

 약 천 삼백년 전 신라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했을 때 다시는 분열되지 않고 평화스럽게 이끌어갈 좋은 사상체계를 확립하기 위해서 가장 총명한 스님을 골라 당나라에 유학을 보내게 되는데 그분이 의상 대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당나라에 도착한 의상은 지엄스님에게서 화엄경을 배우게 되고 8년간 어떤 성주의 집에서 살았는데 그 성주의 딸 선묘 낭자가 시중을 들면서 그의 인격에 감동하고 그의 인품에 매료 되어 여생을 그를 위해 살기로 결심을 한다. 그러나 의상은 이미 불심으로 가득 차 애정에는 무관심하여 당나라가 신라를 침략할 준비를 갖추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선묘에게는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귀국선을 타고 말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선묘는 작은 상자에 법복과 바라만을 넣어 부두로 달려왔지만 배는 이미 멀리 떠나고 있었고 승선을 할 수 없어, 선물 상자만 힘껏 던졌을 때 마침 회오리바람이 불어 상자는 의상의 손에 닿았지만 선묘자신은 그 배를 탈 수 없게 되자 부처님께 기도하여 한 마리의 용이 되어 그 배를 따라 무사히 신라에 도착하게 되었다. 의상은 당나라의 침략계획을 왕에게 보고하였고 왕은 잘 준비해서 당군을 물리치고 의상에게 가능한 한 많은 절을 지어서 화엄 사상을 온 백성에게 널리 전하라고 명하였다. 의상은 낙산사를 짓고, 소백산 자락에 봉황산에 이르렀을 때 이 또한 명당자리임을 확신하고 절을 짓기 시작하자 기존에 있던 고구려 쪽 소승들이 신라에서 온 의상에게 반기를 들고 있어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이 때 용이 된 선묘가 큰 바위를 뜨게 하여 그 소승들 위에서 떨어질듯 떠다니니 겁에 질려서 결국 의상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게 되어 얼마안가 적극 협조하게 됐다. 그리고 고구려 소승들을 겁에 질리게 했던 떠있던 돌은 본전 서쪽에 사뿐히 내려앉아 지금도 떠 있는 듯 누워있으니 거기다 부석이라는 글을 새겨 놓았고 그래서 이 절이 부석사라는 절이 되었고 이 마을이 부석면이 된 것이다. 또 한편 무사히 절을 짓게 되었으나 상량식을 하려하니 대들보가 떨어지고 그것도 여러 번 반복되니 또 다시 곤경에 처해 선묘낭자가 꿈에 나타나 선채로 7일간 기도를 해보라고 권하였고 그대로 해보았더니 마지막 날 밤 꿈에 새로운 청사진이 나타나는데 정남형으로 지어야하고 부처님님이 문 정면이 아니고 측면에 앉아서 동쪽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대로 고쳐지었다니 그제야 완공을 하게 되었다. 어려울 때 마다 여러 번 선묘의 도움을 받은 의상은 그녀의 고마움을 기리기 위해서 본전 앞마당 땅 밑에 묻혀있던 큰 바위를 용모양으로 다듬어서 자기를 위해서 평생을 도와준 선묘를 기념하게 되었는데 그 머리는 본전 아미타 부처님 쪽으로 꼬리는 그 앞에 있는 석등 가까이까지 뻗혀서 놓여있다.


넷째. 국보 다섯 점, 보물 다섯 점이 있다.

 안양루를 나오자마자 맞이해주는 예쁜 석등이 국보 17호이고,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인 무량수전이 국보 18호이고 그 안에 웅장하게 앉아있는 아미타 부처님상이 흙으로 빚어진 부처님 상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해서 국보 45호가 되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창건스님 의상의 상을 모시고 있는 조사당이 작지만 건축미가 뛰어나 무량수전이 중건된 이듬해인 1377년에 지어진 그 역사성이 인정되어 국보 19호가 되었다. 또 그 안에 있던 벽화가  국보 46호로 지정되었다. 이는 범천과 제석천 사전왕상을 그린 것인데 이 절의 창사주인 의상 대사를 기린 조사당에 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를 보호하려는 듯이 제작된 듯하다. 그런데 이 그림 여섯 폭도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부산까지 가져갔다가 해방이 되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기 버려둔 것을 찾아와 지금은 보장각을 새로 지어 그곳에 전시하고 있다.

 보물로는 사천왕문 앞에 있는 당간지구가 첫째이며 가로 6m 세로 8.6m나 되는 1745년에 제작된 거대한 괘불로 비로자나불, 약사불, 아미타불이 상단에 하단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영산회상도가 그려진 것이 둘째이며, 고려 때에 만들어진 화엄경판 670장이 셋째이고 무량수전 동쪽에 있는 삼층석탑이 넷째이며, 다섯째가 자인당에 있는 삼존여래좌상인데 그 가운데 석불좌상이고 양옆에 비로자나불이 좌정하고 있다. 이들은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부석사 동쪽 다른 절터에 있었던 것으로,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작은 절들을 큰절들로 통폐합시킬 때 밑의 석탑들과 부석 바위 옆 석불들과 함께 다른 절에서 옮겨온 것이다.


다섯째. 이 절에는 지팡이 꽃나무가 있다.

 조사당 앞 추녀 밑에 지금은 철망으로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는 한 그루의 골담초인데 대령지라는 책에 의하면 의상대가가 말년에 인도로 떠나기 전 자기가 오래 짚고 다니던 낡은 지팡이를 이절을 장건할 때 기거하던 움막 앞에 꽂으면서 ‘그 싱싱하고 시들음을 보고 나의 생사를 징험하라’고 하였는데 그 나무가 과연 잎이 나고 꽃이 피어 아직까지 살아 있어서, 매년 5월 초에는 노란 개나리꽃처럼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1550년경 퇴계선생은 이 꽃나무를 바라보면서 시를 지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옥 같이 빼어난 줄기 절 안에 살고 있네

석장이 꽃부리로 화하였다고 스님이 일려주네

지팡이 끝에 원래 조계수가 있어

비와 이슬의 은혜는 조금도 입지 않았네

                                            퇴계 이황『선비화』

                                            

이 꽃나무가 두 번이나 수난을 당했는데 한번은 광해군 때 경상도 관찰사가 이 나무를 베어 자기 지팡이로 사용하다가 얼마 안가 인조반정 때 역적으로 몰려 참수를 당했고 또 한 번은 일제 때 일본인 경찰 서장이 이것을 자기 정원으로 옮겼다가 얼마 안가서 불명예 퇴직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전한다.


 부석사는 무려 13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값진 보석과도 같다. 이는 경주의 불국사보다도 100여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런 아름답고 유서 깊은 절을 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