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배움엔 끝이없다.^^*/스토리텔링 모음

(김경수) 금성단

금 성 단

선비촌  김경수


절의의고장 성지 금성단를 찾아오신 관광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영주의 문화를 알리는 김경수입니다.

이곳 금성단은 왕위를 빼앗긴 단종임금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이보흠부사,이일에 연루되어 희생된 많은 의사들을 제사지내는 자리입니다. 중앙한가운데 단은 금성대군 ,우단은 이보흠 부사 좌단은 이름모르는 많은 의사들의 단입니다.

단종복위운동 즉 정축지변은 1457년 세조 3년 10월의 일입니다.

사극의 한 장르를 연상하며 공부해요.. 이지방은 30리가 가도록 기와에 쌀밥에다 굴뚝에는 연기가 끊이질 않았다는 대도시 였어요 큰 참화를 당한 그날은 불바다 피바다로 물들던 때였어요 암울한 시대였죠 (마치 오늘날의 전두환정권 초창기때를 연상하시면 실감날까해요.) 이렇듯 이지방이 풍지박산이 나고 보니 먹장구름이 덮여있어서 200년이 넘도록 순흥도호부는 지도상에서도 사라져 풍기군, 영천군, 봉화현에 따갈리어 졌어요

억울하고 원통하게된 순흥도호부는 1719년 숙종때 가서야 복설이 되고 금성단도 설치되어 오늘날 까지 제를 드리고 있어요.

정축지변은요 밤낮으로 단종복위에만 몰두해있던 금성대군께서 이날도 이보흠부사와 머리를 맞대고 격문을 초하고는 내일 거사를 다시금 확인하고 장롱속에 두고 잠시 잠이 든사이 대군의 몸종인 금련이가 격문을 몰래 훔쳐서 급창이란 관노에게 전해져 한양 세조에게 전해져서 발각이 난 큰 변이었어요 거사에 연루된 모든이 선비 도호부민은 물론 순흥도호부에 위리안치되 있던 금성대군은 사사되고 이보흠 부사도 죽여 소수서원앞 죽계천 소에 수장을 시켰으니 이 소에서 나온 핏물이 7키로미터 되는 지점에서 멈추었다고 하니 얼마나 큰 변이었을 까요..이지방은 오늘날에도 동촌1리 (피끝마을)라고 해요.이곳이 폐부가 되니 삭막하고 나쁜 소문만 떠돌아 다니는데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원혼이 밤만 되! 면 죽계천 물에 나와 울었다니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이겠어요..

소수서원 앞에 있던 숙수사란 큰절도 이때 다 따버리고 당간지주만 동그만히 남아 있어요.

이렇듯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의 6째 아들로서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즉 어린조카 왕위를 복권하려다 종족이 멸하게 되었으니 그당시 백성들이 말하기를 대군은 소백산 산신령이 되셨고 단종임금은 태백산 산신령이 되셨다고들 해요..지금도 단산면 마락리 고치령에 가면 산신당이 있어서 두분의 위패와 영정을 모셔 놓고 제향을 올립니다. 또한 단산면 단곡리 두레골 서낭당에도 금성대군의 피묻은 돌 즉 신석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신석은 금성대군이 단종복위시 피흘린 돌로 죽동앞 냇가에 있으니 찾아주시오 라는 어느한 주민의 꿈에 현몽을 해 주셔서 모신 돌로 정월 대보름날 소를 잡아 재를 올립니다.

이렇듯 순흥은 역사적 피가 흐르는 고장이며 소백산 골골이 전설과 이야기가 흐르는 곳입니다.

금성단의 건너편에는 큰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는데 이나무가 순흥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나무입니다. 이곳의 보배나무를 압각수라고 하는데 정축지변시 불타 고사되었다가 순흥이 복권될시 이나무도 다시 살아나서 오늘날까지 금성단을 지켜주고 있어요. 얼마나 영험한 나무겠어요. 나뭇잎이 오리 발톱같다고 하여 압각수예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만약에 금성대군께서 이지방으로 귀양만 안오셨고 세조가 어린 조카를 내?고 왕위만 찬탈안했으면 순흥은 경북 북부에서 큰 대도시가 되었을 거다 라는 생각을 요...

현재 순흥면사무소 앞에는 봉서루가 있는데 고려시대때 순흥을 지나는 손님을 맞이하는 누각이니 땅도 넓고 좋아서 한강 이남 제일의 도시였데요 또한 임금의 태가많은 성주군도 있지만 이곳 태장리에도 많은 임금들의 태가 뭍힌 곳입니다.

이곳을 찾아오신 여러분 즐거운 나날되시고요 진솔한 “역사”에게 길을 물어 잘사는 내일을 향해 역동차게 살아봅시다. 감사합니다.


2008. 9. .


참고자료 : 순흥지 및 순흥 금성단에 얽힌 충절과 애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