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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엔 끝이없다.^^*/스토리텔링 모음

(권화자)평등교육의 실천자 퇴계이황과 대장장이 배순

평등교육의 실천자 퇴계이황과 대장장이 배순

영주시  문화관광해설사  권  화  자


겨울이면 하얀 눈을 이고 서 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명산소백,

그 아래 죽계천이 휘돌아 가는 명당 숙수사지 터에,  우리나라 최초의 백운동 서원이 자리하고, 북쪽 봉황산 아래에는 화엄종찰의 수 사찰인 부석사가 자리 잡은 영주.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장 영주를 아십니까?


선비의 고장 영주!!

영주선비의 이야기를 들어 보셨나요?

영주선비의 형성은 우리나라 선비의 형성시기와 일맥상통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주선비들은 려말 . 선초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고, 그 절의를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 왔습니다.


  이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에 의해  순흥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창건되고 퇴계 이황의 노력으로 명종임금『소수서원』사액을 받으면서 최초의 사액서원으로서 영주선비들이 체계적으로 배출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소수서원은 영주선비를 길러내는 산실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주선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수 없이 많이 배출되어 선비의 고장으로 그 이름을 전국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영주의 위상을 살린 한 영주선비 배순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선비의 본고장 영주에서 배순은 유교 이념을 실천한 위인이었고, 부모를 정성껏 부양 했으며 순흥읍지에는 효자라 기록되어있을 정도로  효성도 지극하여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마음도 순수 했으며 퇴계의 교육을 받은 제자로서 더욱더 올바른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려고 노력 했습니다.

그는 영주선비의 일원이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을 만치 반듯한 삶을 살아온 일개의 평민 이었습니다.

그는 평민인데 어떻게 퇴계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까?

퇴계가 백운동서원에서 강학을 할 때에 그는 십대 중반의 나이로 어린 소년이었습니다.

그가 살았던 곳은 소수서원 가까운 평장리 였으며 직업은 대장장이인 야공(冶工)이었습니다.

서원에 농기구며 유기제품 등을 공급해주는 심부름꾼으로 신분이 미천함에도 학문이 좋았고, 퇴계가 백운원에서 강학할 때, 자주 뜰아래에 와서 돌아갈 줄 모르고 즐겨 도강(盜講)을 하다가 드디어는 매일 매일을 도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도강의 시간이 길어지자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이게 되고 결국에는 퇴계선생앞에 불려가 해득(解得)함을 시험하게 되었고, 능히 이해하는 그는 퇴계선생의 배려로 양반들과 함께 공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그 어려운 서원의 교육과정을 마친 배순은 과거나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고향에 머무르면서 충과 효를 다한 백성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평민을 사랑하고 서민의 인권도 존중 해준  퇴계는, 그의  미천한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가르쳤고, 그 후 평등교육을 실천한 위대한 교육자로서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퇴계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을 위해 3년 복을 입었으며, 퇴계의 철상을 만들어 집안에 모셔놓고 선생의 은혜를 잊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며 매일같이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 40년(38년) 가까이 세월이 흐른 후 선조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는 슬퍼하며 임금을 위해 3년 상을 모셨으며, 3년 동안 소식(小食)하며 벌레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퇴계에게 배운 제자의 도리로서 유교이념을 실천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퇴계 이황의 삼년상, 선조임금의 삼년상과 연관된 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지역사회에 구전되고 있습니다.


구전되는 내용을 보면 ‘배순은 퇴계의 상을 만들어 살아있을 때처럼 모셨고, 선조 사후에는 나막신을 신고 상복을 갖추어 입고 3년 동안, 초하루와 보름으로 국망봉을 올랐으며 국망봉에서 대궐을 바라보며 절을 하고 곡을 했는데, 그 곡소리가 얼마나 구성졌는지 대궐에까지 들릴 정도였다’는 것으로 그의 행적이 주민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배점의 한 주민은 국망봉에 그의 나막신 자국이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지역주민에게 그의 이야기는 전설이자 신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올라 망곡을 했던 봉우리에 궁궐을 바라보며 울던 봉오리란 의미의 국망봉(國望峯)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합니다.   국망봉은 퇴계가 자주 올랐던 봉오리로써 이전에 이름이 지어진 봉오리입이다.  그럼에도 국망봉은 지역민에 의해 배순과 관련하여 의미가 부여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분의 상(喪)에서 극진하게 예를 갖추었으며 그만큼 슬퍼함이 남달랐습니다. 그는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정도로 스승에 대한 제자의 도리, 임금에 대한 백성의 도리를 다하고자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사망 연대는 기록에 따라 74세 78세 80세로 적혀지고 있습니다.

그가 선조임금(1552~1608)의 삼년상을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탈상이 된 1610년까지는 생존 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의  임종시에도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었다고 믿고 있는 이야기가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배순이 임종시 부인에게 “어디 좀 다녀와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뒤돌아 보지마라” 라는 말을 했는데, 부인은 자식을 데리고 마을로 가다가 혹시나 하고 뒤를 돌아보니, 집에 불이타고 있더라는 겁니다. 부인이 자신의 집을 자세히 보니까 배충신이 화염에 쌓여 하늘로 등천하려고 말에 올라타려고 하더라는 거였습니다. 그때 부인이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용으로 등천을 못하고 소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용소라고 불리어 지고 있습니다.

용소는 죽계구곡의 하나로서 순흥읍에서 기우제를 지냈던 곳입니다.  이처럼 용소는 용이 살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용은 곧 배순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배순이 지역사회에서 귀감이 되는 인물로 알려지면서 1613년 풍기군수 이준이 정려를 신청하기에 이릅니다.

그 결과 1615년 5월에 정려가 내려 졌다고 정려 비문에 적혀있습니다.



배순 정려비
정려각은 대체로 마을의 입구나 중간에 건립되어 지역민에게 유교이념을 일깨우는 상징물입니다. 배순의 정려각도 그가 살았던 평장동 가운데 세워졌습니다.  그 당시 평장동은 순흥현의 영향권에 속하지만 소백산 밑에 위치한 각성마을로서 신분이 낮고 가난하여 지역사회에서 상당히 주변적인 마을에 불과했습니다. 


그럼에도 평장동은 효자이며 충신이었던 배순이 대장간을 운영했던 마을이라 하여 배점이라 불리게 되었고 지금은 어느 농촌 지역과 다르게 지역주민들 중 젊은 층이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운 마을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지역주민들은 그 의미조차도 배순의 선비정신이 어어 졌다고 믿고 있습니다.


  옛 순흥도호부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목적으로 영주 지역에 산재해 있는 문화가옥들 중 특색있는 것들을 골라 재현을 한  선비촌이 개촌을 함으로써 선비의 고장 영주에 오시면 언제든지 배순과의 만남을 가질 수가 있을 겁니다.


 소수서원 사료관 전시실에서는 그의 사후 유물인 묘비석을 접할 수가 있고, 소수박물관 전시실에는 강학당에서 글을 훔쳐 듣고 있는 모습을 만날 수가 있으며, 선비촌 마당에는 한 채의 허름한 초가 안에서 풀무질 소리가 들리고, 쇠 망치소리가 요란한 대장간에서 열심히 일하는 생전 배순의 모습을 접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유교사상이 희박해 지는 요즈음 배움에 임하는 학생들의 선비정신 제대로 알기, 옛 시절의 체험을 통하여  조상 알아가기 등, 각종 행사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병행되고 있는 체험 행사에, 어느 지역보다도 쉬이 선비 정신을 담을 수 있는 장이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마을주민 모두가 배순을 기리며 배순의 순근한 성품을 본 따서 살아온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주민들 또한 동신으로 모시고 있는 배충신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불편한 옛것을 버리고 편리한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옛것이 쇠퇴해 가다가, 어느 순간 웰빙이라는 이름의 등장으로 삶의 방식이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의식도 옛 선비 정신을 되살려 조상의 정신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진정한 참살이가 아닐까 여기며, 선비의 고장 영주가 우리 문화의 중심지로 우뚝 서 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배순 정려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