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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행정 체계.......5

③ 교육시설


 조선시대의 교육제도는 중앙에 성균관과 사학 그리고 지방의 향교등의 교육기관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

향교는 각 읍에 일교(一校)씩 설립되었으며,

성균관의 축소된 형태를 이루어 문묘,, 명륜당, 재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에 의해 주(州)․부(府)에는 교수가

각 1인 군현(郡縣)에는  훈도 각 1인을 두고 교생의 정원은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은 각 90인,

도호부는 70인 군은 각50인. 현은 각30인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향교는 조선 중기이후 거의 무력화 되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도 마비됨으로 인해

중종시대 이후에 나타난 서원이라는 사학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된다.

서원은 원래 선조 또는 선현을 봉사하는 사(祠)와 제자를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되어 성립된 것으로서 인종, 명종대에 그 수가 크게 증가했다.

 향교는 고을의 객사를 중심으로 읍성밖 가까운 구릉지에 남향배치된다.

이는 관부의 지휘감독하에 있으면서 제향과 교육의 양대 기능을 중시 했던 까닭에서 비롯되었다.

대개 간부의 동쪽과 북쪽에 주로 위치하며,

관부와의 거리는 대개 1~3리가 많다.

입지는 전 향교의 90%가 경사지에 1~3단 정지하여 건물을 배치하였고 ,

일부는 평지배치도 있다 ,

건물 구성 기능상 대성전을 중심으로 제향의식의 공간, 문묘구역. 명륜당을 중심으로

교육공간인 강학구역, 보조지원 건물, 주변의 식재로 구분된다.

문묘구역은 대성전, 동․서무와 지원건물인 제기고, 전사청 내삼문이 있다.

대성전(공자, 중국4성 옛 선현의 위패를 모심). 동․서무(西廡)(우리나라 18현, 중국 현철을모심),

제기고(祭器庫)(제사에 필요한 기물을 보관하는 곳). 전사(典祀)(제사를 준비하는 준비실)

내삼문(內三門)(강학구역과 문묘구역으로 통하는 삼문, 중앙문은 신의 출입, 양 협문은 사람의 출입

의식행사시 동입 서출(東入 西出)함. 강학구역으로는 교육공간인 명륜당, 동, 서재(西齋)가 주된 건물이고

보조지원 기능 건물로는 고직사, 외삼문 누문이 있다.

명륜당(明倫堂)은 공자의 사상을 강론하는 곳이며.

동 ․서재(東․.西齋)는 학생들이 독서하며 기거하는 곳으로

명륜당의 오른쪽은 동재. 왼쪽은 서재가 배치되는데

동재에는 수준이 높은 학생이 기거했으면 명륜당 앞. 뒤에 좌우대칭 되게 배치되어있다.

누문은 1층은 출입정문, 2층은 마루를 깔아 휴식, 여름철 독서 등으로 사용되었다.

 서원은 신라시대부터 유래를 찾아 볼수 있는 서재. 정사류의 사학교육과 고려시대에 발생하여 세워진 사묘제도가 결합된 사학교육기관이다.

입지는 인적 환경요소와 지리적 환경요소로 대별된다.

인적환경요소는 서원의 건립위치에 있어 사우에 배향되는 존경받을 만한 선현이나

그 지역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 주로 나타난다.

(예 :소수서원 은 안향, 순천의 옥천서원은 김굉필 등)

주향자 자신이 생존시 세운 서당이 발전하여 서원이 된 경우

(도산서원-이황 . 둔암서원 - 김장생)도 있다.

지리적 환경요소는 성균관이나 향교는 관학으로서 관청의 행정적인 관리를 받지만

서원은 사학으로서 성리학을 연구하며 교육하는 기관으로 은둔사상적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서원건축은 행정중심지로부터 주로 원거리에 설립되고,

 향교건축은 주로 근거리에 설립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입지상 풍수지리상 길지인 풍광경승지에 자리잡은 경우가 많으며

일부는 사찰을 폐하고 입지한 경우도 있다.  좌향으로는 암향과 남동, 남서향이 많다.

 교육관련 건물로는 강당(講堂), 동. 서재(東. 西齋) 장판각(藏板閣), 부속서당(附屬書堂) 등이 있고 ,

제향관련 건물로는 사당(祠堂) 전사청(典祠廳), 영정실(影幀室) 등이 있다.

또한 강학이나 제향 등의 주 기능 이외에 휴식이나 기념 또는 관리기능을 담당하는  부속 건물로

누각, 정자, 고사, 비각 등이 있다. 누각은 16세기 서원에서만 볼 수 있는데

위치는 대개 외문자리인데 하층은 정문 2층은 개방된 정자로 사용된다.


④ 제사 시절


  나라를 세우면 반드시 종묘를 세우고 사직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지방의 고을에서는 삼단(三壇)과 일묘(一廟)를 중심으로 공식적인 제사를 지냈으며,

삼단은 사직단, 여단, 성황단이고 일묘는 문묘이다.

조선시대에 종묘, 사식 등 중앙에 있던 제사를 위한 시설이외에

거의 모든 고을에 이 삼단(三壇) 과 일묘(一廟)

그리고 사(祠),각(閣) 묘(廟), 서원(書院) 등이 있었다. 

지방고을에는 제사 시설의 기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직단(社稷壇) : 사(社)는 토신이고, 직(稷)은 곡신이다.

백성은 땅이 없으면 살 수없고 곡식이 없으면 살 수 없으므로

여기서는 백성을의 복을 비는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한 고을의 신(神) 중에서 사직(社稷)이 제일 높다고 하였다.

고을의 서쪽에 단을 두었으며, 중추절에 제사를 지냈다.

문묘(文廟) : 공자의 위패를 모셨으며, 역대의 여러 유현들을 종사했다.

중앙에는 성균관에 있었고 지방에는 향교에 있다.


여단(厲壇) : 후손이 없는 귀신 등 제사를 못 받아먹는 귀신을 제사 를 지내던 곳으로

반드시 고을의 북쪽에 설치되게 되어있다.

조선시대에는 정종2년(1400) 중앙과 각 지방에 설치하였다. 여제단(厲祭壇) 이라고도 한다.


성황단(城隍壇) : 성황신은 한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국도주부군현진산(國都州府郡縣鎭山)의 신을 말하며

성황단은 마을이나 고을의 진산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성황은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국행성황을 위시하여

각 고을과 마을  그리고 동구나 산로에 이르기까지 그 수가 무수히 많았다.

그수가 무수히 많았던 만큼 성황신과 민중의 생활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⑤ 상업시설


조선시대 상업시설인 장시는 시전(市廛)과 향시(鄕市)로 구분된다.

상설시장인 시전은 개성, 평양, 수원 서울등 몇몇의 대도회지에만 설치되었으며,

그 설치 기준은 행정적 위치가 높지 않으면 설치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지방도시에 있어서의 상업은 거의 정기시인 장시에 의존하였다. 

장시란 별다른 시설이 없는 일정한 장소에 상인과 부근 주민이 집산교역하는 곳으로

보통 장문 또는 향시라 불리웠으며,

흔히 장이라고 하였다.

장시는 원칙적으로 1월6장, 즉 5일장으로

30~40리의 이동여정을 표준으로 산재된 장시의 망을 이루어

상인이 각 시를 편력하기 좋도록 되어 있었다.

장시의 입지조건으로는 다수의 이용인구, 다량의 물자공급, 교통의 요충지 등이 중요시 되어

인구가 모여 있고 ,

교통의 요충에 있는 부, 군, 현의 청사 소재지에는 예외없이 장시가 있었다,

읍성이 있는 경우에는 성문 밖에서 장시가 열리는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