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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지방행정체계........2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체계



1. 읍성의 일반


(3) 읍성이란


① 읍성의 등장

 읍성은 지방의 관부(官府)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이다.

읍이라는 말 자체가 처음부터 성으로 둘러싸인 취락을 의미하였으나

그 가운데 종묘(宗廟)와 왕궁(王宮)이 있는 도성(都城)과 구별하였다.

이처럼 읍성은 지방의 주요 거점에 군사적인 기능과 행정적인 기능이 복합되어 축조된 성곽이다.

중국에 있어서 읍․성은 처음에는 동일한 개념이었다가 차츰 분화되어

국읍, 성과 읍, 읍과 도, 등의 개념에 역사성이 첨가되어 차츰 구분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즉  문명의 발달과 더불어 유통경제의 발전은 인구의 집중화 현상을 수반하였고

이에 따라 도시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 도시에 성벽을 둘러쌓은 것을 읍성이라 하였다.

이 읍은 곧 행정체제를 갖추어 원초적인 나라의 형성하였으니

읍과 성을 막론하고 성벽으로 둘러쌓인 도시란 점에서는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이러한 발전 단계에서 큰 읍을 구분하여 종묘와 사직이 있는 것을 도(都)라 하고,

그렇지 않은 것을 읍(邑)으로 정하게 되었다.

 중국에 있어서는 읍성이 이미 청동기 시대에 축조되어

국가의 기원이 읍제국가(邑制國家) 에서 출발하였으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언제쯤 읍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고조선의 경우 도성인 왕검성 이외 각처에 읍성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한나라의 군현이 설치되었던 지역인 평안도, 황해도 지역에는

낙랑의 치소였던 토성이 남아있고 대방군의 치소였던 토성도 사리원 동쪽에 남아 있다.

 또 이 시기의 현에도 작은 읍성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이들은 관청건물과 지배층이 사는 일부지역을 토루(土壘)로 둘러 싸여 있으며,

넓은 평야를 낀 평지나 낮은 구릉에 위치한다.

삼국시대에 있어서는 산성과 읍성이 따로 축조되었다고 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으나

지방의 주요한 도시를 둘러싼 읍성이 산성과 같은 산을 의지한 위치에 있었던 흔적이 차츰 밝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충남 부여의 송국리에서 B. C.4~5세기경 집자리를 보호할 목적으로 목책을 시설한 유적이 밝혀졌으나,

중국식의 읍성은 한군현의 설치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하겠다.

고구려의 평지도성인 국내성은 장방형 평면의 4면에 성과 치를 고루 배치하고 성 밖에는 해자를 둘렀으며,

성문에는 옹성을 두르고 성문에 맞추어 격자형 가로망을 내었다.

성벽 축조 단면에 규형의 모습을 보이는 성벽 위에는 성첩(城堞=여장(女墻) 을 둘렀던 흔적이 보이는 것 등

중국의 도성제를 본  받은 평지도성(平地都城)의 좋은 예를 보인다.

 삼국시대의 경우 읍성은 곧 왕성이 아닌 지방의 중심지에 있었던 문화, 행정, 경제, 군사의 중심이 된 성곽을 일컫는 개념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수효는 대단히 많았다고 여겨진다.

백제의 22 담노(擔櫓)와 신라의 52 읍륵(邑勒)은 성 이외의 지방의 유력한 읍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백제의 사비천도 이후에 나타나는 5 방성(方城)및 200성과 고구려의 176성 등은

지방도시의 계층 서열, 수효를 나타내는 것으로 대부분 성곽으로 둘러쌓인 읍성을 나타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 기능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산성과의 분화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 분명한 구별이 있었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구주(九州) 5소경(小京)이 지방의 큰 도회지였고,

여기에 문무왕 9년에서 동왕11년 에 축조한 주성(州城), 소경성(小京城)을 3유형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왕경을 모델로 시가지계획이 실지되어 있으면서 배후에 포곡식 산성이 부수되어 있는 도시,

둘째는 시가지계획이 실시되지 않았으나 시가지 전체가 성곽으로 둘러쌓인 도시,

셋째는 시가지계획이 실시되어 있지 않고 포곡식 산성과 테뫼식 산성이 주․소경에 부수되어 있는 도시로서,

이 주(州)․소경성(小京城)이 일부 중국식 읍성에서 실시되고 있는 시가지 계획을 수용하고 있고,

그 기능이 도시를 방어할 목적과 보민용(保民用)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보아 중국식의 읍성에 접근된 성곽이라 하겠다.

 이처럼 통일신라시대 읍성은 어떻한 형태와 지형조건에 의하여 축조되었는지를 확실하지 않으나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평야에 네모꼴로 축조한 다음 일정한 구획을 나누었던 읍성들이 후대까지 계속 수 개축을 하여 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읍성들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주변의 산성들로 보아서는

유사시에 인근의 산성에 입보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유형과 달리 백제 말기에는 산성의 형태가 차츰 계곡 아랫부분까지 포함하면서

넓어지고 있어서 읍성의 기능을 포용하는 단계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읍성의 순수한 개념이 도입된 것은 고려시대 후기라 하겠다.

이 시기에 축조된 읍성은 보다 군사적인 성격을 띠면서 연해안지역부터 축조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 때 축조된 읍성은 주로 왜구의 창궐과 깊은 관련이 있으면서

입지도 평지에 접근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읍성의 축조 양상은 조선초기에도 이루어져

세종 조를 중심으로 의욕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당시의 읍성축조는 전 국력을 기울이다시피 하는 역점사업이었으며 ,

우선적으로 왜구의 피해가 가장심했던 충청․전라․경상의 하삼도(下三道)로부터 중점적으로 추진된다.

이 읍성이 본격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하는 것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335개소의 행정구역 중

읍성이 수록된 것은 96개소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도별로 살펴보면, 충청도 15개소, 경상도,27개소, 전라도 20개소, 황해도,4개소, 강원도6개소, 평안도16개소, 함길도8개소이다.

따다라서 하삼도에 축조된 숫자는 62개소로 전체의 96개소의 읍 성수에 대비하면 64%의 백분율을 나타내어 압도적인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출몰한 왜구에 대비하기 위한 노력의 성과라 하겠다.

또 한 중종 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330개소의 행정구역 중 읍성이 160개소로 증가하고 있으나, 영조 대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임진왜란이후 퇴락한 곳이 많아 334개소의 고을 중 읍성이 107개소로 감소하여 나타나고 있다.

 당시 축조된 읍성의 성격은 비상시 청야입보(淸野入堡)하여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과

 해변옥야(海邊沃野)의 산업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써 보면 우리나라의 읍성은 행정적인 기능과 군사적인 기능이 잘 조화된

복합적 기능의 성곽이라 할 수 있겠다.

읍성의 축조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조선시대 세종대부터 이며 경기이북에 있어서

도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파견하고 있는 경우와는 달리

일관되게 충청․전라․경상도 도순무사(道巡撫使)가 하삼도의 축성업무를 전담하고 있다.

따라서 삼도(三道)의 연해읍성은 그 입지 조건이나 구조및 축조기법에 있어서

거의 같은 양상을 띠고 있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세종 20년(1438)에는 「축성신도(築城新圖)」를 반포하여

읍성을 규식화 하고 있어 이 이후에 축조된 전국의 읍성이 일률적인 양상을 띠고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고려시대읍성들은 조선왕조에 이어졌으며,

차츰 석축으로 고쳐지거나 호구의 증가에 의해서 넓게 고쳐 쌓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특히 세종 때부터는 경상도 , 전라도, 충청도의 바다가 가까운 지역의 읍성들이 새로이 축조되거나 고쳐 쌓았다.

이때에는 성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성벽의 높이를 높이면서 옹성과 치성, 해자를 시설하도록 중앙정부에서 감독하였다.

또 지방의 수령들에게는 근무기간 중에 지켜야할 근무지침으로 성을 보수하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또한 읍성을 쌓고 나서 5년 이내에 무너지면 죄를 삼고, 견고히 쌓으면 상을 준다는 규정도 마련되어있다.

 읍성들은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10년 일본에 의하여 읍성철거령이 내려져 대부분의 읍성들이 헐렸다.

현존하는 읍성들은 정조 때 축조된 수원읍성( 화성(華城))이 대표적인 것이며

이밖에 동래읍성, 해미읍성, 남원읍성, 고창읍성, 비인읍성, 남포읍성, 홍주성,

보령읍성, 진도읍성, 흥덕읍성, 경주읍성, 진주읍성, 안양읍성,. 거제읍성,

청도읍성, 장기읍성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내륙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있었고

해안근처의 고을에는 거의 모두 있었다.

읍성은 부․목․군․현의 행정단위의 등급에 따라 그 크기도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차이는 주민의 수효와 관계되었으며,

큰 곳은 3,000척 이상 중간규모는 1,500~3,000척

작은 것은 1,000척에 못 미치는 경우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현 남부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