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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지방행정체계.........3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체계


1. 읍성의 일반


(3) 읍성이란


②입지와 공간구성


㉮ 외부공간

 도읍(都邑) 선정에는 풍수지리설이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풍수에서 산수가 입지선정에 영향을 주었고,

방위는 시설물의 공간배치에 영향을 주었다.

읍지의 위치가 풍수적 이상형에 맞지 않는 입지라도

읍기의 주 청사만은 그 취락 내에서 지리적 최길지에 위치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이 읍기를 풍수설에 가급적 충실하게 위치시키기 위하여

고을을 둘러싼 주어진 지세도 되도록 풍서적으로 이용하고

명당을 중심으로 청룡백호 등에 따르는 성곽을 축조하였다

이들 읍성구성의 체계상 1 적인 요소로는 각종의 종교적인 시설 ,

2차적으로는 각 방위의 풍수지형들이라 할 수 있다.

먼저도읍의 풍수지형에서는 진산을 먼저 정하는데,

보통 읍기의 북쪽에 진산또는 주산이 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330개의 고을중 267개에 진산이 명기되어 있고,

그중 북쪽이 143개로 53%가 된다.

또 읍기의 정면에는 안산이 위치하고 봉수대를 설치하는 경우가 있다.

 도읍의 종교적인 시설로는 소위 3단(壇)1묘(廟) 즉 사직단, 여단, 성황단,과 문효이다.

 일들은 일반 도읍의 경우 대부분 성밖 동서남북에 동심원상으로 배치되게 된다.

그중 여단과 성황단은 성밖 북측이나 진산에 풍수지형을 감안하여 인접배치한다.

사직단은 성밖 서측에, 문묘는 성밖 동측의 향교내부에 있다.

  교육시설로는 공립학교에 해당되는 향교와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서원이 있다.

향교는 보통 동남 3리 이내에 위치하여 있고,

서원은 특정방위에 따르지 않고 보통 도읍의 중심으로부터 10리 이내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 외 시설로는 빙고가 보텅 동문 밖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은 동문내에 위치하고 있는 각종 창고와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상업시설로는 주례의 면조후시의 원칙이 있으나

소도읍 에서는 성문밖에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성 밖에서부터 성문을 거쳐 성내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주거지역의 위치는 이속 등 아전들은 성내에 거주하고 있으나

반촌의 동족부락은 성밖의 경작지에 인접하여 형성하고 있다.

천민이 거주하는 특수부락인 역촌은 성밖 2km 이상 떨어져서 거주하는 것이 관례이다.


㉯ 읍성의 규모와 형태


 도읍의 내외부 영역의 경계를 뚜렷이 구분짓는 것은 읍성의 유무이다.

조선중기에 편찬된『여지도서(輿地圖書)』를 기준으로 볼 때,

당시의 총334개의 읍성중 약1/3인 110개에 읍성이 축조되어 있었고,

224개의 읍에는 성이 없다.

그 중 부와 유수부는 100% 대도호부 60% 도호부44.9% 군24.1% 현 22.1%가 축성되어

위계가 높은 도  읍일수록 성곽이 많이 축조외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읍성의 지역적인 분포를 보면 ,

해안지방과 북쪽 국경지방 그리고 동래에서 한성으로 향하는 주요 역로 주변에

거의 대부분이 집중되어 군사적인 의미가 얼마나 강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성곽이란 군사상의 자위방위를 어느 특정한 구역을 쌓아올린 벽(壁), 누(壘), 책(柵)등을 일컫는다.

한편 이러한 군사적 역할 이외에 성곽의 도시 구성내지 도시계획적인 측면에서의 일반적인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소시의 입지선정과 공간 규모를 결정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둘째 도시의 활동 범역을 한정시키는 역할,

셋째, 자연지형조건에 따른 성곽의 형태는 객사와 관아를 비롯하여 주요 기능의 배치, 도로패턴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넷째 성곽의 실질적인 기능외에는 상징적인 역할을 들 수 있다.

특히 성문은 도시의 관문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위용과 미려함은 지배자와 성내거주자들의 권위를 상징한다.

 이러한 성곽의 분류는

㉠ 성벽자체의 입지와 형태.

㉡ 축성의 기능,

㉢ 축성재료

㉣ 축성의 평면구조 등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하고 있다.


1) 읍성의 규모

 우리나라 읍성의 규모는 대규모 읍성으로 볼 수 있는

둘레가 10,000척(포백척 기준 :4,475m) 이상이 24개로서

그 중 도호부 이상의 읍성이22개, 6,000척(2,685m)~ 10,000척(4,475m)의 11읍성

 도호부 이상이 7개가 되어 대체로 상위 도읍일 수록 규모도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규모읍성인 3,000척(1,342m)~6,000척(2,685m)읍성이

전체 110개중 42개가 되어 가장 많았으며,

그중 도호부 12개, 현이16개이다.

소규모 읍성으로 볼 수 있는 1,000척(475m)~3,000척(1,342m)

읍성은 29중 현이 15개로 가장 많고 1,000척 미만의 읍성도 현이 3개이다.

이처럼 읍성의 행정적 위계와 읍성의 규모간에는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고,

지역적으로도 평안도와 함경동 읍성의 규모가 크다.

이들 축성재료를 보면, 석성이 74로 67%를 차지하고 토성이14개,

그 재료를 알 수 없는 것이 22개이다.


2) 읍성의 평면형태

 평면형태는 일반적으로 원형, 방형, 부정형으로 분류하는데,

대체로 원형과 방형이 가장 많고 지형및 기타의 조건이 영향을 미치면 부정형이 될 수밖에 없다.

원형은 61개의 읍성으로 56%로 가장많고

방형은 33개로 30.3%, 부정형은 15개로 13.7%로 가장 적다.


3) 읍성 내부의 공간구성


 풍수지리가 도시의 자연환경적 입지 선정, 중심도시 시설의 위치,

전체 도시의 주 좌향 등 주로 도시형태의 거시적,

외적 경관의 해석과 이용에 관계되어 왔다면 읍성 내부의 건물 배치와 공간구성 등

미시적, 내적 경관의 인위적 조성에 영향을 끼친 것은 중국 유교경전의 하나인

주례(周禮)『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이다.

이 책의 장인조에는 “ 장인영국방구리방삼문(匠人營國防九里旁三門)

국중구경구위경(國中九經九緯經)   도구궤좌묘우사(涂九軌左廟右社)

면조후시 시조일부(面朝後市 市朝一夫) ”라 하여

수도의 계획은 9리 4방(약 391만평)의 크기로 하여 3개씩 문을 두고

도성 내에는 동서 9, 남북, 9개의 도로를 설치한다.

이때 남북도로의 폭은 수레 폭의 9배에 해당하며,

도성의 중앙에 궁궐을 두고 그 좌측에는 종묘를 우측에는 사직을 세운다.

궁궐 앞에 조정을 두고 뒤쪽에는 시장을 설치하되

그 크기는 일부의 땅으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도성의 규모, 도로의 배치와 폭, 주요 공공시설의 위치, 

토지이용의 기준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러한 내용은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도 잘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각 시대별 도성이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지형적 영향 등으로 특히 지방의 읍성에서는 불규칙한 형태가 나타났고,

각 읍들 간에도 공공시설의 종류와 배치 가로망에는 서로 간에 차이를 보인다.


4) 가로망 체계

 도로의 형태는 도시의 시가지 형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전토의 도시에서 도로형태는 도시의 자연적 입지와 물리적인 시설인 성곽의 문묘 위치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즉 성곽이 있는 경우는 성문을 통해서만 외부와 연결이 이루어짐으로

성내의 간선 도록망 체계는 읍기의 입지오 성문의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있다.

그러나 성곽이 없는 경우 관아 앞길과 그에 직교하는 간선이 주요 도로를 형성했다.

지방 도시의 읍성은 거의가 동서남북 4개의 문을 가진것이 일반적이며,

이 4개의 문을 연결하는 십자형 의 가로망을 간선으로 하고

이 가로들에 평행 또는 직교하여 일정간격을 두고 소로들이 나 있다.

이 간선의 폭은 대체로 서울의 종로에 해당되는

16척(1궤의 노선폭이 8척=249.68~499.36㎝)이고

가로망도 훨씬 단순하였던 것오로 보인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기록된 읍성의 간선 도로망을 분류해 보면

크게 5가지로 분류된다.

십(十)자형과 T자형이 전체읍성의 3/4를 차지하고

그 중에서도 십자형이 가장 많았다.

지방의 소도읍에서는 T자형이 가장 지배적인형태였다.


5) 건물의 공간배치

 조선시대의 읍은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였으며,

행정시설이 공간적으로 중심지역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때 객사, 아사, 향청을 3핵이라하여 반드시 갖추어져 있었다.

객사는 객관이라고도 하며,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는 향궐망배하는 한편 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였다.

아시는 고을의 수령이 거주하는 곳이고,

향청은 향민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을의 수령을 보좌하는 기관으로 향사당이라고도 하였다.

이 중 왕을 상징하는 객사가 진산을 배경으로 중앙 또는 북단에 놓여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동헌 또는 향청이 이와 병렬하든지

또는 바로 그 전면에 위치하였다.

그 외 관아 건물로는 동서로 나누어 문관이 사용하는 건물은 주로 서쪽에,

무관이 사용하는 중영. 훈련원. 군관청 등은 주로 동쪽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행정적, 군사적 시설물 외에 읍성 내에는 창고 등이 있었으나

이들의 기능은 비슷하나 명칭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