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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지방행정체계........1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체계



1. 읍성의 일반


(1) 우리나라의 성곽(城郭)


 성곽이란 군사적. 행정적 집단의 공동목적을 갖고

거주주체의 일정한 공동생활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유리한 자연지세

또는 인공구조물을 쌓아 방어 또는 공격의 전초기지역할을 담당하는 구조물을 지칭한다.

 또한 성곽의 축성은 국방뿐만 아니라

지방제도의 정비란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성곽의 나라라 할 만큼 전국 도처에 많은 성곽이 전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성곽을 이용하는 성부전술이 발달되어 외적을 물리침으로써 오늘날 까지 국가를 잘 보전하여 왔었다.

삼국시대 이래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성곽을 축조하고 축조기술도 뛰어났다는 사실은

전해오는 수많은 성곽유적을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다.

성곽은 한 나라의 국가 보장을 위해서 예상되는 적의 침입에 대한 방위를 위해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피하려는 발상에서 피난은 물론 수비를 하고,

나아가 기회를 포착하여 공격으로 전환하려는 거점으로 하여

국토를 보위하려던 국방의 보루가 성곽이다.

따라서 성곽은 예로부터 험하고 요해한 곳에 설치하여

국토를 보전하는 것이 일반적인 규칙이라 하였다.

한편 성곽이라 함은 내. 외성을 통칭하는 의미로

내성만을 의미하는 성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2) 성곽의 등장

 우리나라의 지형은 백두대간의 태백산 부근에서 인천과 원산만을 연결하는 임진북,

예성남정맥을 중심으로 그 북쪽에 고구려,

그 남쪽은 백제와 신라가 태백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구분되었다.

고대국가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는

민족부흥의 기강이 치열한 토대에서일어나 각각 군주적 색채가 농후하였다.

인구 증가와 질서 확립, 그리고 생산증지에 따르는 국력의 팽창은,

그 남은 힘으로 나라 경계를 개척, 확대가 필요를 느껴 정복국가로 발돋움하였다.

인근의 군소세력과 국가들을 통합한 후에는 국경이 인접하자

삼국사이의 직접적인 마찰 대립과 이해가 서로 충돌되어

더욱 강력한 군사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성지를 물질적으로 보루라고 하면, 군인은 정신적 성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삼국은 여러 가지 여건이 허락하는 한 형세가 좋은 곳에 축성하여

곳곳에 많은 성지를 남기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에 이르기 까지 외환과 전란이 계속되는 중에도

능히 국가적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산성제도 때문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나라가 당하는 어려움 즉 지리적 위치나 인접 국가와의 관계로 인해 받는

많은 외침 앞에서 그 많은 국난 때 마다 산성에 거점을 두고 항쟁하여

외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이렇게 국난을 지켜온 성 특히 산성들이 오늘날 대부분 무너져

원형파악이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나라에 성곽이 출현하는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대체로 군현제가 실시되기 전인 성읍국가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아주원시적인 형태를 추적한다면 이보다 더 앞선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규모가 커지고,

현재의 형태에 가까운 성에 토착하고 있던 집단이 이 집단으로부터

안전을 도모하기위해 초보적인 단계이기는 하나 정치적, 군사적 기능을 갖춘

토축의 성곽을 구축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상, 성읍국가시대로 지칭되는 변․진한사회가 신라의 정치기구 내로 결속되면서

중국의 군현제가 도입되어 설치되게 된다.

물론 당시의 모든 성곽이 반드시 치소였던 것은 아니고,

이전부터 주목되어 왔던 극히 일부의 성곽에만 관아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삼국이 통일된 이후에는 관아가 설치된 성곽도 군사적인 기능이 상실되고

단지 행정기능만을 수행하는 치소로서 관아의 울타리 역할만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조에 이르러 읍성의 군사적 기능이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은

고려 말 부터 나타나는 왜구의 빈번한 침범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토성과 같은 옛 성곽구조물로써는

이 무렵의 군사적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워졌으므로 새로운 읍성을 쌓게 된다.

문헌상에 고려시대의 군현치소를 버리고

새로 적절한 지세를 이용한 읍성이 축조되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런 새로운 현상은 조선시대 초에 연안(沿岸)으로부터 활발하게 전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