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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압구정 이야기








압구정(狎鷗亭)
      
      조선조 때 세도가 한명회(韓明會)의 정자 이름이다. 
      정확히 오늘날 압구정동 산 301번지 3호 언덕바지에 있었다. 
      동호대교 남쪽 끝자락의 뚝섬 쪽으로 돌출한 벼랑위 였으니 
      구정(鷗亭)초등학교 뒤쪽 현대아파트 74동자리쯤 될 것 같다.
      압구정동은 고종말년 이후 조선시대부터 일제 때까지 
      경기도 광주군 압구정리로 불리다가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韓明會는 재물을 몹시 밝혀 탐욕하였고, 주색을 즐겼으며, 
      널리 여러 집들을 점유, 첩을 많이 두어 사치가 극에 달하였다. 
      그가 권좌에 있는 동안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빠짐없이 
      정자에 초대,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이 정자의 주인공인 한명회는 정난(靖難), 좌익(佐翼), 
      익대(翊戴), 좌리(佐理)의 네 개를 겸한 공신이요, 
      세조 성종 두 임금을 들여 세웠으며, 
      예종 성종때는 영의정으로 평생동안 부귀영화를 누렸던 사람이다.
      ‘압구정’이란 ‘친할 압(狎)’과 ‘갈매기 구(鷗)’ 곧, 
      ‘벼슬을 버리고 강촌에 묻혀 갈매기와 친한다’는 뜻의 정자다.
      그러나 그는 송나라 정승 한충헌이 임금을 들여 세운 공을 
      흉내내어 자신을 한충헌에 비겼고 
      또, 한충헌의 정자가 압구정인 것을 본 떠, 
      명나라 한림학사 예겸에게 청하여 
      압구정을 자신의 정자 이름으로 삼은 
      전형적인 사대주의자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국왕만 쓰게 되어 있는 용봉(龍鳳)차일(遮日)을 
      이 압구정에 쳐서 호사의 극치를 맛보려다가 
      성종의 눈 밖에 나고 성종의 명에 의해 헐린 것으로 전해진다.
      압구정의 잔치에는 수령, 방백들이 보낸 선물이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친해보고자 했던 갈매기는 
      한명회의 기심(欺心: 자기의 양심을 속임)을 알았던지 
      한 마리도 날아오지 않아 ‘친할 압(狎)’ 대신 
      ‘누를 압(押)’자를 써서 ‘압구정(押鷗亭)’으로 비아냥돼 
      불러지기도 했다.
      ‘임금이 하루에 세번씩/ 
      은근히 불러보아 총애가 흐뭇하나/ 
      정자가 있으되 와서 노는 주인 없구나/ 
      가슴 가운데 기심만 끊어졌다면/ 
      비록 벼슬바다 앞이라도/ 
      갈매기와 친압(親狎)할 수 있으려만’ 
      최경지(崔敬止)라는 선비가 한명회의 위선과 
      부귀를 풍자한 글이다.
      우리 한자에 집을 보통 집 ‘가(家)’자로 쓴다. 
      ‘가(家)’자는 ‘ ’와 ‘豕’의 합성문자다. 
      말하자면 돼지(豕)가 비를 안맞을 정도의 집(家 )이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人)이 살기 ‘좋은(吉)’집을 ‘人+吉’=집 
      ‘사(舍)’로 쓴다.
      그런데 집이 사치스러울 때 흔히들 집 ‘옥(屋)’자로 쓴다. 
      ‘옥(屋)’는 주검 ‘시(尸)’자와 이를 ‘치(至)’자의 합성문자. 
      집이 사치스러우면 ‘죽음(尸)에 이른다(至)’는 뜻으로 
      재물에 대한 탐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압구정은 한명회의 의도대로 갈매기와 
      친하지도 못했고 
      또, 새가 날아오지도 않았으므로 ‘구(鷗)’자에서 
      새(鳥)를 빼면 ‘압구(狎區)’가 된다.
      서울에서도 가장 고급아파트(屋)가 줄을 지어 늘어선 
      지금의 압구정동은 이름 그대로 강남구를 ‘압구(押區)’하면서 
      강남땅의 노른자위가 되어 있다. 
      일부 부유층들이 압구정동의 내력을 외면한채 
      그의 영화와 부귀만을 재현하며 사치의 극을 달리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물질적인 풍요와 유행의 거리로 불리는 압구정동은 
      500년전만해도 닥나무가 무성한 저자도(楮子島)가 
      한강에 그림처럼 펼쳐졌던 곳이다. 
      당시 이 저자도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사람이 
      조선조 세조(世祖)때 권신 한명회(韓明會)다. 
      그의 별장 압구정(狎鷗亭)은 오늘의 땅이름을 낳았다.
      많은 문사들이 풍류를 즐기던 압구정 자리에는 
      고층의 현대식 아파트가 솟아 있다. 
      주변 일대는 초현대식 건물과 차량, 젊은이들이 가득한 
      로데오거리로 활기가 넘친다.
      예종비인 장순왕후, 성종비인 공혜왕후의 아버지이면서 
      세조 예조 성종을 섬긴 한명회는 73세까지 이곳에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