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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
      
      [황성신문(皇城新聞) 1909년 8 월29 일] 에 실린 기사다.
      “그저께 오전11시반 돈화문 앞에서 대황제폐하 즉위 
      제2회 기념예식 경축을 하는데 각 사회단체 및 각급학교 
      생도 등은 나란히 정렬하여 만세를 외치고 경축가를 합창하고, 
      고아원 생도들은 군악을 연주한 후 오후 1시 행사를 마쳤는데, 
      각 학교가 방학 중이어서 몇개 학교에서만 생도를 모집해 
      경축하였다더라.”
      대한제국 제2대 황제인 순종(1874~1926)의 즉위 2주년 기념식을 
      보도한 글이다. 
      융희(隆熙)황제 순종은 2년 전 8월27일 아버지 고종으로부터 
      직무를 물려받았다. 
      이 기사는 신문 2면 셋째단 ‘잡보(雜報)’ 난에 들어있다. 
      첫째단은 ‘논설(論說)’, 둘째단은 ‘통감부인(夫人) 도한(渡韓)’ 
      기사가 차지하고 있는데, 
      ‘일본인 통감이 병이 나 그 부인이 병간호를 위해 
      곧 내한한다더라’는 내용이다. 
      통감 부인의 방한 소식이 조선 황제 기념식보다 
      크게 취급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황성신문은 박은식·장지연 등 민족진영 인사들이 
      모두 떠나 맥이 빠진 상황이었다. 
      그런 신문이 통감부의 검열을 의식해 ‘알아서 기사를 배치’한 
      결과이겠지만, 
      그 밑바탕에는 대한제국 황제를 우습게 여기는 일본인의 
      시각이 깔려있다. 
      그런데 순종은 일본에 의해서만 무시당한 것이 아니었다. 
      ‘방학 중이어서 몇개 학교에서만 생도를 모집했다’는 내용처럼, 
      자기 백성들에게도 푸대접을 받았고, 
      심지어 문무백관들로부터도 ‘서명(署名)문안’을 받는데 그쳤다. 
      순종은 즉위 때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이를 보도한 대한매일신보는 1면에는 관련소식을 싣지 않고 
      2면 ‘잡보’난에, 
      “그저께 대황제폐하께서 즉위의식과 진하식을 행례하시난데?
      연미복이 없는 이는 입참치 못하였다더라” 라고만 했다(1907.8.29). 
      황제 즉위식 보도치고는 너무나 짧다. 
      반면 광무(光武)황제 고종의 즉위식 때 독립신문 1면은 
      감격적인 논설로 전면을 채웠었다.
      “광무 원년 10월12일은 조선 역사에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 
      지난 몇천년 동안 중국의 속국 대접을 받은 때가 많더니, 
      하나님이 도우사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샤, 
      조선인민이 어찌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
      (독립신문 1897.10.14)
      순종은 즉위 석달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창덕궁에 갇히다 시피한 순종이 하는 일이라곤, 
      일어나서 식사하고 산책하다가 외부인사를 접견한 뒤 
      선물이나 나눠주는 역할이었다. 
      이 무렵 순종에 관한 보도 중 ‘경비·선물 하사’ 내용이 
      많은 까닭이다.
      ‘대황제폐하께옵서 남순하실 때 배종하였던 한국관리들을 
      3등으로 나누어, 1등에게는 금시계, 2등에게는 은시계, 
      3등에게는 동시계를 반급하신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9.9.2)
      민족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던 시기, 
      국가 지도자는 이런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조선일보 2009.9.26)
      순종은 늘 ‘심신이 온전치 못하다더라’는 소문에 시달렸다. 
      어머니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1895년)은 그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주었다.
      "을미사변 당일 왕태자는 일본 자객의 칼에 맞아 기절했다. 
      그날 이후 왕태자는 넋이 나간 듯 건청궁을 맴돌았고, 
      어마마마를 부르다가 혼절하곤 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열국 외교관은 왕태자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고 본국에 보고했다(이민원 ‘한국의 황제’)."
      민간에서는 순종이 세자 때부터 ‘성(性) 불구자’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이렇게 전한다.
      “세자가 장성했으나 음경이 오이처럼 드리워져 
      발기되는 때가 없었다. 
      하루는 명성황후가 계집종을 시켜 세자에게 성교하는 것을 
      가르쳐주게 하고 자신은 문밖에서 큰 소리로 
      ‘되느냐, 안되느냐?’ 하고 물었으나 계집종은 
      ‘안됩니다’라고 했다. 
      명성황후는 가슴을 치며 자리를 일어섰다.”
      순종에게 후사가 없었던 점을 생각하면 
      그의 신체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홍륙(金鴻陸) 독차(毒茶)사건(1898년)도 순종의 몸을 
      크게 상하게 했다. 
      김홍륙은 고종의 러시아어 통역이었으나 
      거액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 유배형을 받았다. 
      매천야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김홍륙은 이에 원한을 품고 어전에서 음식을 담당하던 
      김종화를 매수해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독약을 타도록 사주했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셨던 고종은 한번 마시고 토해냈지만, 
      맛을 구분하지 못하던 황태자는 맛을 보다가 
      복통과 어지럼증으로 쓰러졌다.”
고종(좌)과 순종
      순종이 정신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소문과 다른 기록도 있다. 1907년부터 13년간 궁내부에서 일한 일본인,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는 1926는 펴낸 ‘대한제국황실비사’에서 “순종은 자애로운 인정을 지녔으며, 주변인물의 이름과 가족의 일까지 잘 알았으며, 연회석상에서 누구와도 흥미로운 얘기를 나누었다. 명석한 두뇌와 기억력은 참으로 경이로웠다”고 썼다. 순종은 보학(譜學·족보연구학)과 전통의례에도 뛰어났다는 것이다 순종은 경쟁과 살벌함을 싫어했다고 한다. “도쿄에서 스모를 관람하실 때 전하는 선수들이 거대한 몸을 날리며 장관을 연출하는 모습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으시며, 시종에게 ‘패한 자가 너무 안되었구나. 모래흙투성이가 되어 필시 고통스러울거야’ 라고 말씀하셨다. (대한제국황실비사)” 그는 국난을 헤쳐나가기엔 너무 유약(柔弱)하고 무책임한 지도자였다. 죽음으로 일본에 저항하지 못하고 ‘왕가의 보전’에만 집착하다가 1926년 4월25일 심장병 등으로 눈을 감았다.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은, “책임으로는 이조 5백년의 최대 죄인이요, 인간으로는 일개 가련한 처지였다”고 평했다. 그의 국장(國葬)에서 연희·보성 학생들이‘6·10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 땅에 ‘왕권의 궤적(軌跡)’이 사라지자, ‘민권의 궤적’이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글 : 지해범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