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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영주 관광

소수박물관 나들이

소수박물관으로  나들이 해요

 

 

 고대로부터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민족의 정신문화, 유교!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문화 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 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을 통하여

민족 정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민족문화의 전당이다.
이곳은 조선유학의 메카답게 서원과 관련한 귀중한 문화유산과 유학의 전말을 눈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유교박물관이다.

소수박물관은 2004년 9월 22일 개관을 시작으로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전시함으로써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생동감 있는 역사 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다가가고 있다.

 

소수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은

소수서원으로 진입하는 길과,  선비촌으로 진입하는 길

두가지를 선택 할 수가 있다.

오늘은 그중 선비촌으로 진입을 해 본다.

 

 

선비촌 매표소를 통과하고 처음 만나는 두개의 각

열부각(烈婦閣) 과 충복각(忠僕閣)의 모습

이 두개의 각은 문수면 만방리에 자리했었으나 도로 확장을 위해 이곳 선비촌으로 이건되었다.

 

열부 박씨는 반남박씨로 대산간 승임의 후손인 박사건(朴師騫 1796~1820 )의 딸이다.

17세에 민조현에게 출가하였다가 신행전에 부군(夫君)과 사별(死別)하고 청상으로 시부모를 정성껏 봉양하고 있던 중

이웃의 김조술이란 자가 박열부를 범하려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조술은 이에 반감(反感)을 가지고 박씨는 아이를 셋을 낳았고

또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서 허무맹랑한 말을 유포(流布)하여 열부의 체면을 손상하므로

열부는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하여 관아에 가서 울며 호소하였으나 조술의 금력에 의하여 관의 처리는 부진하고

오히려 열부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전환됨에 열부는 억울함을 참다 못하여 마지막 결심으로

다시 관에 가서 거듭 호소하다가 사태가 불리함에 칼을 빼어 자결하니

관비(官婢)가 열부의 시신을 검사하고 유소이건(乳小而乾 : 젖은 적고 말라 붙었으며)

복첩어배(腹捿於背 : 배는 등에 붙었다는 뜻)하니

진처자야(眞處子也 : 순진한 처자라는 뜻)라고 증언하였고

사림에서는 열부의 억울함을 누차 청하는 동안 6년 간이나 장례(葬禮)도 치루지 못하였다.
한편 노비 고만석이 상전의 결백을 증명코져 6년동안 서울에서 걸식하면서 쟁(錚)을 6차례나 울리고

천인(賤人) 신분으로 재상가의 문전에서 열부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이 도움이 되어

드디어 1825년에 조술은 처형되고 나라에서 박열부의 정려(旌閭)를 내리고

노비 고만석에겐 충복각을 내렸다...

 

 

 

 

진입로 紹修博物館 표지석

2004년 개관 짧은 세월의 흔적이 엿보인다.

 

입구모습

저 자리에서 뒤돌아보면 선비촌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와 시원하다.

 

 

박물관을 진입하니 여러 박물관의 홍보 팜플렛이 보이고

벽 한쪽엔 개관시에 걸어둔 "널리 옛 일을 알면 오늘날의 일도 알게 된다"는 뜻의

박고지금(博古知今)이란 액자가 눈에띈다.

 

 

 

계단을 내려가면 좌측벽면에 자리잡은 교비하나

일명 청다리라고 불리었던 교비로 죽계제월교(竹溪濟月橋)비이다.

 

비석에는 '죽계제월교竹溪齊月橋', '康熙庚寅五月ㅇㅇ立'이라고 씌어 있다.
곧 숙종 36년인 1710년에 세웠다는 것이다

 

 

 

기획전시실에는  묵향 가득한 영남선비들의 편지로 구성된

김항회 기증유물이 8월 31일까지 전시될 계획이다.

 

8월이 지나면 또 어떤 유물이 전시될까?

 

 

기증유물실관 1전시실 사이에는 조선의 4대 사고중 하나인

태백산 각화사에 소재한 태백산 사고 건물 전경이 자리하고있다.

지금은 각화사가 봉화관내에 자리하지만

정축지변이전 순흥도호부시절엔 그곳역시 순흥의 영역이었다.

 

 

제 1전시실 내의 가흥리 압각화와 고인돌 선돌의 모습

이곳 영주에는 현재에도 이처럼 선사시대 유물이 200여점 이상 남아있다.

이는 예부터 영주는 사람이 살기 좋았다는 증거다.

지금도 국내 최장 4.6Km죽령 터널이 열리면서

서울에서 두시간 거리로 자연과 더불어 살기좋은곳으로 각광을 받고있다.

 

 

이 용두 당간 장식은 풍기읍 성내2동 236번지에서 하수도 공사중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 유물을 통해 그림으로만 보던 보당寶幢의 실제 모습을 복원해 볼 수 있었고,

현재 국립대구박물관 광장에는 복제된 용두 장식을 올린

10미터가 넘는 실제 보당이 대구 하늘을 가르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이 용은 입안 가득 문 여의주 뒤로 줄을 거는 도르래가 감추어져 있다.

도르래에 걸린 줄이 용의 턱 아래 뚫린 구멍으로 내려져 깃발을 올리고 내릴 수 있게 고안되었다.

이러한 장치는 매우 과학적이고 이 유물의 쓰임을 알려주는 귀중한 단서가 되고있다,


 

 

순흥부인과 순흥초군청인장

 

순흥(도호)부인은 관인으로 많이들 들어왔겠지만

초군청은 잘 들어본적 있으신가요?

 

 순흥 초군청

순흥 도호부시절 순흥에는 다른 지방에서 볼수 없는 농민들의 자치기구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순흥초군청이라고 하는데

순흥 고을은 토호사족들의 세력이 유난히 드세어

하인배와 머슴들까지도 상전의 세력에 힘입어 행패를 심하게 부렸다.

따라서 고을의 힘없는 민초였던 농민들은 그들의 횡포에 기를 펼수가 없었고

억울함을 견디다 못해 관가에 고발도 해 보았지만 그들의 세력에 밀려

관에서도 수수방관을 하니 그 행패는 점점 더 기승을 부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보다못한 이 고을 참봉 김교림은 이 악폐를 바로 잡고자 조정에 고하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순흥 초군청인을 내려보내 자치적으로 초군청을 운영하도록 하여

사긴 두영을 초대 좌상으로 삼게 되었다.

당시 초군청 직인이 날인된 문서는 관아의 문서와도 맞 먹을 정도로 효력이 있었다.

 

이리하여 순흥 토호 세력가의 머슴들이 저질렀던 악폐도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선비촌 저자거리에서는

순흥초군청과 금성대군대제등 각종 공연이 10월 24일까지 펼쳐질 예정이다.)

 

 

'성학십도'(1568)

 

퇴계선생께서, 17세의 어린나이로 조선조 제14대 임금으로 등극한 선조(宣祖)에게

성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임금께 올렸던 열까지 그림과 설명이다.

 제1 태극도

 제2 서명도 

제3 소학도

제4 대학도

제5 백록동규도

제6 심통성정도

 제7 인설도

제8 심학도

 제9 경재잠도

제10 숙흥야매잠도

 

 

우리나라 최총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현판으로

사액서원으로 될 당시 대제학 신광한이 이름을 짓고

명종임금이 직접 써서 내려주신 현판이다.

 

 

하사준(下賜樽)

이 준들은 숙종대왕이 주세붕선생 사당에 하사한 술 항아리로 제향에 쓰는 기물이다.

준(樽)이라고하는 이 술항아리는 동물의 형상으로 만든것으로,

그 주된 형상으로는 코끼리, 소, 돼지, 양 등 제물로 쓰이는 동물들이다.

 

주로 황실이나 서원 성균관 등 유학기관의 제실에서 제를 올릴때 사용하는 일종의 제기이다.

코끼리 모양은 상준(象樽), 양 모양은 미준(未樽), 돼지모양은 해준(亥樽)이라고 한다.

이 외에 소의 형상을 한 준은 희준(犧樽)이라고 한다.

 

 

소수서원 강학모습

왼쪽 마루밑 처마끝에 숨어서 도강중인 퇴계선생의 평민제자 배순의 모습이 보인다.

 

 

 

구암 황효공이 초안을 잡고 퇴계이황이 완성을시킨 음양오행의 원리가

다 들어있다는 억범도 병풍

 

 

공자 - 주자 - 안향 - 주세붕 - 퇴계로 이어지는

철상의 모습

 

 

관람이 끝났으면 잠시 짬을내어 명종임금 친필

소수서원(紹修書院)현판 탁본체험을 해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