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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영주 관광

[스크랩] 이보흠(李甫欽) : 忠莊公1397년(태조6,丁丑)~1457년(세조3,丁丑),

이력(履歷)

 

    

          이보흠(李甫欽) :

 

 1397년(태조6,丁丑)~1457년(세조3,丁丑), 영천이씨.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경부(敬夫), 호는 대전(大田), 정조때 시호는 충장(忠莊), 휘 석지(釋之) 할아버지의 다섯째 아들인 부사직(副司直) 휘 현실(玄實) 할아버지의 아들이시며, 어려서 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학문을 좋아 하셨는데,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의 문하생으로서,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과 강공 효문(康公孝文)등과 공부하셨다.

1415년(태종15,乙未) 18세때 永川 西山 松谷아래 유방선(柳方善)이 지은󰡐�������������태재(泰齋)󰡑�������������에서 수학 하시고,

1429년(세종11,己酉) 32세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 5등으로 급제, 이듬해 동부훈도관으로 공법(貢法)논의에 참여하여 전제(田制)와 세법을 논의 하셨다.

1434년(세종16,甲寅) 37세때 사정(司正)으로 우효강(禹孝剛)․김순(金淳) 등의 문사와 함께《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찬수에 참여하셨다.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로 선발되어 성삼문(聖三問), 박팽년(朴彭年) 등 후일에 사육신이 된 제현들과 함께 박사(博士)가 되어 역대통감(歷代通鑑)을 편수(編修)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으셨고,

1443년(세종25,癸亥) 48세에 감찰로서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기록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 오시는 등 국제 외교에도 공을 세워셨고, 다녀 오신후 성균관 주부(主簿)가 되셨다. 이어 축성법에 대한 건의 또는 공법논의 등에 참여하셨고, 외직을 맡을 때의 경험 등을 토대로,

1445년(세종27,乙丑) 50세때 사창법(社倉法)에 관한 건의를 하여, 사창제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자(뒤의 문종)의 총애를 받으셨다.

1448년(세종30,丁卯) 53세에 지함양군사(知咸陽郡事)로 외직을 맡고 있던 중, 사창제도를 시행하려는 세자의 뜻에 따라, 지대구군사(知大邱郡事)로 옮겨져 대구(大邱)에서 최초로 사창법(社倉法)을 시험적으로 실시하셨다. 대구지방의 효과적인 사창법의 시행으로󰡐�������������순량(循良)󰡑�������������의 칭송을 얻었으며, 문종은 즉위 후 총애하던 할아버지를 임기를 채우지 않고 경직(京職)에 초탁(超擢)하려 하였으나, 사창제의 계속적 실시를 위하여 임기를 마치셨다. 그 공으로

1452년(문종2,壬申) 57세때 사헌부 장령에 초배(超拜)되셨고,

1454년(단종2,甲戌) 59세에 직예문관으로《세종실록》편수의 기주관이 되셨다. 할아버지는 중앙정부에 계실때나 특히, 지방장관으로 재직시에 공무처리를 공정하고 신속하게 잘 하셨고, 생활이 검소하시고 백성을 사랑하셨으므로 주위의 존경을 받으셨다. 문종때 사헌부 장령(掌令:종4품)으로 계실때 수양대군에 의한 단종의 선위사태가 발생하자 벼슬을 버리시고 대전마을로 돌아 오셨다가, 다시 소명되시어

1457년(세조3,丁丑) 62세때 순흥부사(順興府使:정3품)로 있을 때, 세조에 의해 순흥에 유배되어 있는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와 서로 의기를 투합하여 재향품관(在鄕品官)․군사(軍士)․향리(鄕吏) 등 이른바 영남사인들을 규합하여, 폐위된 단종(端宗)의 복위를 위한 격문을 지어, 은밀히 사방으로 보내, 의사․협격들을 순흥고을로 모여 들게 하여, 군비를 모으고, 무기를 장만하고, 군사를 조련하는 등, 영월에 유배되어 있던 단종임금 복위를 꾀하는 거사가 무르익어 가던 가을 어느날, 밀의를 엿들은 순흥부의 한 관노의 밀고에 의하여 관군의 습격을 받은 순흥고을은 온통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는 도륙을 당하면서 폐부되고 말았다.

이로서 복위를 도모하셨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순절하신 사육신(死六臣)에 한분을 더하여 사칠신(死七臣)이라 일컬어지시며, 박천(博川)에 유배되신 뒤, 금부도사 최수남(崔秀男)에게 교살(絞殺) 되셨다.

1738년(英宗戊午)에 관직이 복원되시고

1739년(英宗己未)에 충장(忠莊)이란 호를 하사 받으셨다.

할아버지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인 권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의 제자인 유방선(柳方善)에게서 출신지인 영천에서 수학하셨다는 점과, 길재(吉再)의 묘에 문제(文祭: 以文祭之함)를 지냈다는 점, 그리고 대구의 수령을 맡을 때 공렴품관(公廉品官) 등 영남지방의 재향사류(在鄕士類)와 연결하여 성리학적 향촌질서의 이론으로 주자(朱子)가 고안한 사창법을 최초로 실시하였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영남 성리학 학통의 계승과정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단종 복위사건으로 순흥도호부가 폐부된 이례 숙종(肅宗) 8년까지 227년간 순흥지방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정조때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셨고, 광주(光州)의 대치사(大峙祠)와 영천(永川)의 송곡서원(松谷書院), 청안(淸安)의 향사(鄕祠)순흥의 성인단(成仁壇)등에 제향(祭享) 되셨다.

 

그로부터  200여년이  지난  숙종 9년(1683)에  순흥은  명예가  회복되고,

이어  종45년(1719)  고을사람 이기륭(李基隆)이 부사 이명희(李命熙)에려,

단소(壇所)를 설치하게 된입니다. 

 

【참고문헌】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 순난제신(殉難諸臣), 世宗實錄, 文宗實錄, 世祖實錄, 正祖實錄, 國朝人物志, 사림파(士林派)의 유향소복위운동(留鄕所復位運動)李泰鎭, 震檀學報 34·35, 1972·1973)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大田先生實紀 (古上 991.1 이45?)

李甫欽 (1397∼1457) ; 字 敬夫, 號 大田, 本貫 永川.

木板本(重刊). - [發行事項不明].

5卷2冊 ; 28x20.1cm.

四周雙邊. 半匡 ; 20x15.5cm.有界.10行20字.註雙行. 上下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보흠의 실기이다. 이보흠은 현실(玄實)의 아들이며 유방선(柳方善)에게 취학하여 공산(公山)에서 독서하였다. 이로부터 문장이 크게 진보하여 동문인 서거정(徐居正), 강효문(康孝文)등 대가도 따르지 못하였다. 1429(세종 11)년 문과에 합격하여 집현전 학사로 선발되어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박사가 되어 《역대통감(歷代通鑑)》을 편수(編修)하였다. 단종이 양위(讓位)하자 1456(세조 2)년 육신(六臣)들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주살(誅殺)되고 단종이 영월에 유폐(幽閉)되자 선생은 강개함을 이기지 못하여 침식(寢食)을 폐하였다. 이듬해 순흥부사(順興府使)가 되어 산협(山峽)길을 걸어 영월에 가서 단종을 문후(問候)하고 순흥에 유배(流配)된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와 밀의(密議)하여 순흥의 병사를 이끌고 영남의 의사들과 체결(締結)하여 단종을 옹립하기 위해 격문(檄文)을 지었다. 이때 벽 뒤에 숨어 엿듣던 관노(官奴)가 이것을 알고 금성군의 시녀(侍女)와 결탁해서 격문을 몰래 훔쳐 서울로 올라가던 중 풍기군수(豊基郡守)가 이를 알고 군병을 풀어 추적하여 격문을 빼앗아 상경고변(上京告變)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생은 박천(博川)에 유배되었다가 처형되고 순흥부(順興府)는 혁파되었다. 1683(숙종 9)년 순흥이 복읍(復邑)되고 1698년 단종이 복위된 후 군내(郡內)의 선비들이 선생의 원통함을 군수와 감사에게 호소하여 묘에 비를 세우고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명희(李明熙)가 금성대군이 죽던 곳에 삼단(三壇)을 모아 상단에 금성대군을, 우단에 대전공(大田公)을, 그리고 좌단에 순절한 사람을 봉향했다.

重刊序 ; 張錫英.

舊序 ; 洪直弼.

目錄.

卷之 1. 詩(2首).

疏 ; 築城救弊, 請改定田制, 上四條.

啓 ; 貢法, 社倉設立.

記 ; 巨濟邑城.

跋 ; 柳泰齋先生詩集.

祭文 ; 祭冶隱吉先生墓.

檄文 ; 謀復檄文 上王時檄文.

墓碣銘 ; 礪山郡事韓公.

列朝實錄.

卷之 2. 附錄 ; 諭書, 諭大丘郡事李甫欽書, 御製忠臣列傳, 傳, 丁丑錄, 吏曹回 啓, 大臣獻議, 請諡 啓, 奎章閣草記.

綸音 ; 奎章閣獻議.

批旨 ; 御製忠臣壇 賜祭文.

卷之 3. 世系圖.

卷之 4. 年譜.

卷之 5. 贈遺 ; 柳泰齋先生詩, 上言, 行狀, 行狀後?, 墓碣, 遺墟碑文, 墓碣銘, 神道碑銘, 成仁壇碑文, 祭墓文, 竪墓告由文, 竪碑告由文, 改墓碣竪遺墟碑告由文, 順興復邑後祭文, 順興神壇告由文, 成仁壇改築告由文, 神壇寒食常享祝文, 竹溪書院常享祝文, 松谷書院奉安文, 大峙書院常享文, 道溪書院奉安文, 道溪書院常享文, 肅慕殿配享時告由文, 肅慕殿奉安文, 祠堂告由文, 遺墟碑閣上樑文, 永慕齋上樑文, 興州銀杏記, 永慕齋記, 順興府誌, 永川郡誌.

跋 ; 李家淳, 田愚, 李昺淵.

 

1.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사우록(師友錄)

이보흠(영천인문장능리치성검솔수의구폐불취야상송순흥위금성군유소협모세말급

치계이사각유박천경주지)

李甫欽(永川人文章能吏治性儉率雖衣垢弊不取也嘗宋順興爲錦城君瑜所脅謀歲末及

馳啓而事覺流博川竟誅之)

 

2. 이준록(彛尊錄)

이보흠(李甫欽)영천인(永川人)으로, 문장(文章)이 있고 이치(吏治)에도 능했으며, 성품이 검솔(儉率)하여 비록 의복이 때묻고 해어졌더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일찍이 순흥 부사(順興府使)로 있을 적에 금성군 유(錦城君瑜)의 협박에 의해 난(亂)을 도모했다가, 미처 이 사실을 치계(馳啓)하기 전에 일이 발각되어, 박천(博川)에 유배되었다가 끝내 처형되었다. 요우(僚友)나 향당(鄕黨)의 친척

 

3.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이보흠(李甫欽)

#경상도(慶尙道)  순흥(順興)

*성인단(成仁壇)

숙종기해건(肅宗己亥建).

제향. 금성대군(휘유 시정민 본전주). 이보흠(호대전 부사 증이참 시충장 본영천).

祭享. 錦城大君(諱瑜 諡貞愍 本全州). 李甫欽(號大田 府使 贈吏參 諡忠莊 本永川).

 

*송곡서원(松谷書院)

숙종임오건(肅宗壬午建).

제향. 유방선(호태재 유일 주부 본서산). 이보흠(호대전 부사 증이판 시충장 본영천). 곽 순(호경재 사간 본현풍). 이현보(호농암 지중추 시효절 본영천). 심지원(호만사 영의정 본청송). 윤봉오(호석문 우참찬 시숙간 본파평)

祭享. 柳方善(號泰齋 遺逸 主簿 本瑞山). 李甫欽(號大田 府使 贈吏判 諡忠莊 本永川). 郭 珣(號警齋 司諫 本玄風). 李賢輔(號聾巖 知中樞 諡孝節 本永川). 沈之源(號晩沙 領議政 本靑松). 尹鳳五(號石門 右參贊 諡肅簡 本坡平)

 

# 충청도(忠淸道)  청안(淸安)

*향사우(鄕祠宇)

영조무오건(英祖戊午建).

제향. 금성대군유(본전주). 이보흠(호대전 순흥부사 증이판 시충장 본영천).

祭享. 錦城大君瑜(本全州). 李甫欽(號大田 順興府使 贈吏判 諡忠壯 本永川).

 

 

이보흠(李甫欽)

호 : 대전(敬夫)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관 : 영천(永川)
출생일 : 1397년(태조6)
시대 : 조선시대



선생의 자는 경부(敬夫)이며, 호가 대전이요,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구려 신호위 대장군 영양군(永陽君) 이대영(李大榮)의 7세손이며 고려말에 보문각 대제학으로 있다가 조선이 들어섬에 용인으로 퇴거 은둔한 남곡(南谷) 석지(釋之)의 손자이다. 선생은 1397년(태조6) 아버지 현실(玄實)의 장자로 영천읍 대전마을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용모가 준수하며 어려서부터 효우하고 지절이 있었으며 독서를 특히 좋아하셨다.

선생은 그 당시 일세의 대학자요, 명문장가로서 세종임금으로 부터도 스승의 예로서 대접받았다고 하는 태재(泰齋) 류 방선(柳方善)선생의 문하에서 꾸준히 면학에 힘써 왔던 바, 산수가 좋은 팔공산(八公山)에 들어가서 다년간 학덕을 연마하여 마침내 1429년(세종 11)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어서 집현전 박사로서 성삼문(成三問)등 후일의 사육신(死六臣)들과 더불어 역대의 역사편찬에종 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아왔다.

그후 선생께서는 군위현감, 함양군수, 대구군사등 외직도 맡아서 애민 선정에 트게 힘쓴 바도 있었다. 특히 대구군사 때에는 빈민구제를 위한 사창(社倉)제도를 실시한 일은 유명하다. 해동잡록에 "공은 문장에 능하였고 사무처리에 재주가 있었으며, 성품이 검소하여 옷이 좀 떨어져 기워서 입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우리는 선생의 역량과 관원이되 결코 뽐내지 않았으며 백성과 더불어 검소하게 살아간 청백한 한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가 있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선생은 의금부(義禁府)에 의하여 거사 음모의 전모가 발각되었고 금성대군은 안동감옥으로 이송되어 사사(賜死)당하게 되고, 대전 선생 또한 박천(博川)으로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극형에 처해졌다. 이리하여 정의와 충절의 큰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애석하게도 비분한 생애를 마치고 말았다. 그때에 선생의 나이는 65세 고령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선생을 일컬어 사육신을 가일신(加一臣)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숙종때 선생은 저 사육신들과 함께 신원이 되었다. 그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추증이 되었고, 충장공(忠莊公)이라는 시호가 내리졌다. 이리하여 황폐했던 선생의 묘소는 다듬어지고 1700년대 이후에는 유덕을 기리며 추모하는 여러 건조물이 영조되었는 바, 영천읍 대전마을 생가터에는 유허비가 세워졌고, 화북면 죽공동 단애 묘소 앞에는 영모재(永慕齋)가, 임고면 덕연동에는 대전정사(大田精舍)기 세워졌고, 청통면 송곡서원(松谷書院)에서는 류 태재등 여러 선생과 함께 제향도 되고 있다.

 때의 거창현감 여 병재(如 甁齋)
김 현석(金 玄錫)은 김 문기의 아들로서
함께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그의 아들 계훈(繼勳)은
위천면 당산으로 달아나 숨어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 때 상왕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여 영월(寧越)에 귀양 보내고
금성대군(錦城大君)은 순흥(順興)으로 유배되었다.

세조 3년(1457)에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대전(大田) 이 보흠(李 甫欽)과 더불어
단종 복위 를 위해 영남 일대에서
기병하자는 격문을 돌리려 하다가 발각되어
영남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처형 당하고
노산군(魯山君)은 서민으로 낮추어 졌다가
그 해 겨울 원통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 보흠의 아들 오인(旿仁)이

남하면 오가리(五可里)에 숨어 지냈는데

훗날 자손들 은 거창읍 웅곡(熊谷)등지에 옮겨 살았다.

세종 16년(1434)에 가조(加祚)에
살던 고은(孤隱) 이 지활(李 智活)은
사마시(司馬試)를 거 쳐
운봉 현감(雲峰 縣監)으로 있다가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벼슬을 버리 고 신라 말 박처사(朴處士)가
숨었던 가조의 박유산(朴儒山)에
들어가 망북정(望北亭)을 짓 고
북쪽 영월을 향해 곡배(哭拜)하며
비분(悲憤)의 날을 보내다가 세상을 마쳤다.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목숨을 빼앗긴
사육신(死六臣) 대칭으로 김 시습(金 時習),
남 효온 (南 孝溫) 등 생육신(生六臣)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인 경은(耕隱)
이 맹전(李 孟專)은 성주(星州)
출신으로 문과를 거쳐 정언(正言)·
서령(署令)등을 역임하고 1440년부터
이듬해 까지 거창 현감을 지냈다.
계유정란이 있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눈 멀고 귀 먹었 다고
핑계하여 두문불출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화를 입은 사람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신원되어
이보흠은 충 장공(忠莊公) 시호(諡號)를 받아
웅곡(熊谷)의 성인재(成仁齋)와 지금의
덕천서원(德泉書院) 에 제향하였고
이 지활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문정공(文靖公) 시호를 받았으며
그 후손들에 의해 거창읍 동변리(東邊里)에
망월정과 신도비가 세워졌다.
망월정이란 영월을 바라본다는 숨은 뜻이 있다.
김현석(金 玄錫)도 정조 때
신원되고 고종 때 이조판서에
추증 되었으며 거창읍 대동리에 비각이 세워져 있다.

실록 05/15(기해)
지대구군사(知大丘郡事) 이보흠(李甫欽)에게 유시하기를,
  “네가 아뢴 사창 사의(社倉事宜)는 정부에 내려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행하기 어렵다.’ 하고...... 네가 시험하되 그 포치(布置)의 방략은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하고 누그러지게 하여 번요(煩擾)하게 하지 말라. 집현전의 의논을 동봉(同封)하니 아울러 참고하라.
  1.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鄭昌孫)...... 교리 김예몽(金禮蒙)......은 말하기를, ‘사창(社倉)의 법은 전현(前賢)이 이미 시험한 것이니, 행하는 것이 적당함을 얻으면 참으로 보흠(甫欽)의 말한 것과 같아서 심히 백성에게 편하지마는, 의논하는 자가 이 법이 비록 실상은 백정을 위하여 베푼 것이나, 이식(利息)을 취한다는 이름이 대체에 누가 될 것 같고, 또 사장(社長)을 다 청렴하고 근실한 사람으로 얻지 못하면 혹은 벼슬을 얻기를 바라고, 혹은 나머지를 훔치려고 엿보아 이자를 취하기에 힘써, 거두어 들이는 것이 중도에 지날 것입니다........【원전】 5 집 68 면

 

세조 2년(1456년 丁丑),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이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과 밀의하여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사건이다.

시비(侍婢) 김련(金連)이 내통하던 관노와 짜고 격문을 훔쳐 고발하여

큰 출세하려던 것을, 시비는 즉시 잡아 가두고 한양으로 향하던 관노를 좇아

풍기현감 김효급이 역마 세 필로 추격하여 경기도 장호원에서 관노를 체포했다.

 

풍기현감이 격문을 빼앗아 불태우려 하자,

"그 격문을 가지고 한양에 가서 고발하면 경상감사가 될 터인데, 왜 태우려 하십니까?"

풍기현감 김효급은 마음이 변하여 안동으로 달려가 안동부사 한명청(한명회의 6촌)에게

고발하였다. 

한명청은 순흥을 들이쳤고 또 한양에서 철기부대가 내려와 순흥을 짓밟았다.

순흥은 피바다가 되었고, 순흥부는 불바다가 되었으며, 남녀노소를 역적이라고 무참히

타살하였다. 흐르는 피가 죽계천을 흘러, 십 리 아래 '피끈이마을(안정면 동촌동)'까지

이어졌다 한다.

순흥 호족이였던 안씨들은 죽임을 당하고, 피신했던 일가들도 근 100년을 순흥에

드나들지 못했다.

 

단종의 왕호가 회복되고, 역신으로 몰렸던 인사들이 복권된 것은 숙종 30년(1704년),

금성대군의 사건이 난 후 242년 후의 일이다.

 

출처 : 愛日堂
글쓴이 : 溪巖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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