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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영주 관광

[스크랩] 배순 정려비

 

배순정려각 

 

 

 

비석 뒷면  

 

            비석

 

배순은 조선 중기 때의 사람으로 1615년(광해군 7)에 충신과 효자의 면모를 인정받아 집 앞에 붉은 문을 세워 표창 받았다. 이를 정려(旌閭)라고 하는데, 정려비는 1649년(인조 27) 그의 손자 배종이 세웠다. 지금의 정려비는 1755년(영조 31) 그의 7대 외손인 임만유가 ‘충신백성(忠臣百姓)’이라는 말을 넣어 고쳐 세운 것이다.
배순은 천성이 유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에 힘써 풍기 군수였던 이황(李滉)이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유생에게 학문을 강론할 때 그도 배우도록 배려하였다. 이황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3년상을 지내고 철상(鐵像 : 사람이나 동물 등의 형상을 쇠를 부어 만든 상)을 만들어 기리는 등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배순이 죽자 군민들이 정려각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그의 성인 ‘배(裵)’를 따서 ‘배점’이라 불렀다.

 

풍기 군수였던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배순의 충성과 효도 등 귀감이 되는 생활이 정려받도록 하여 정려가 상신(上申)되었고, 1615년(광해군 7) 5월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34년 후인 1649년(인조 27) 3월에 그의 손자 배종(裵種)에 의하여 지역출신 문사인 단곡(丹谷) 곽진(郭 山+晋)이 쓴 비음(碑陰)으로 묘비와 함께 정려비(旌閭碑)가 세워졌다. 현재의 비는 1755년(영조 31)에 그의 외손 임만유(林晩維)에 의하여 ‘충신백성’이라는 글이 들어가면서 개립된 것이다..
단곡(丹谷) 곽진(郭 山+晋)은 시에서 “충효는 본래 타고나는 것인데, 사람들은 외물에 이끌려 천성만 잃는다네.[忠孝元來本自然 人牽外誘喪其天] 참된 충성 참된 효도 오직 배순이니 이 유허 지나가는 이 누군들 예를 표하지 않으리.[純忠純孝惟純耳 過此遺墟孰不虔)]라며 배순의 덕을 기렸다.

배순은 조선 명종~광해군 3대에 걸쳐 생존했던 인물로 소수서원 인근 마을인 배점리에서 철을 만드는 장인이었다. 천성이 순박하고 근면하여 평생 망언을 하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학문을 좋아하였고 근처에 소수서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인이었던 까닭에 서원에서 정식으로 공부할 수 없었다.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재임하자 소수서원에서 유생에게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꼭 공손히 뜰아래 무릎을 꿇고 참가하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는 이황이 풍기 군수로 재임할 당시 16~17세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학문적 열정에 감복한 이황이 다른 제자와 함께 가르쳤다. 선조가 승하하자 매월 초하루 보름에 음식을 가지고 뒷산에 올라가 3년 동안 궁궐을 향해 곡을 하면서 제사를 지냈다. 마을 뒤의 초암사 뒷산은 배순이 선조를 제사한 곳이라고 해서 국망봉(國望峰 : 나라, 즉 선조를 바라본 봉우리라는 뜻)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배순은 이황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3년복을 입고 무쇠로 퇴계의 상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다. 그가 죽는 날 갠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까마귀가 뜰에 무리로 모여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 부인이 집이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화염 속에 남편이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는데 이날 배순은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배순(裵純)은 무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였다. 어느 곳에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하고 풍기로 이사 와서 산지가 30여 년인데, 죽계(竹溪 : 지금의 순흥)의

 상류인 평장동(平章洞) 어귀에 가게를 지어 놓고 풀무간일로 업을 삼았다.
대장장이란 자들은 그릇이 틈이 있으면 진흙을 바르고 물이 새면 밀랍으로

때워서 자못 거짓으로 꾸며서 이익을 취하는데, 배순은 이와 반대로 기구가

틈이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알려 틈이 있다 하고는 값을 내렸고, 기구가 물

이 새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물이 샌다고 말하여 가격을 내렸다고 한다.

나는 이로써 그의 정직함을 알았다.
성품이 벌을 치기를 좋아하여 벌이 거의 수십 통이었는데, 일찍이 벌을 죽이지

않으려고 꿀을 다 뜨지 않고 다만 때때로 숟가락을 잡고 뚜껑을 열어 그 맑은

것만 취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로써 순의 청렴함을 알았다. 순이 옛적에 선성(宣城)

지방에 살면서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심상삼년의 복을 하였고 선생의 철상(鐵像)

을 만들어 놓고 제사지냈으니, 그 현인을 앙모하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선조대왕이

 돌아가심에 순이 또한 삼년 상복을 입었고, 복을 마침에 담제(禫祭)를 베풀었으니,

그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아! 순의 선행을 사군자들에게 물어 찾으니 또한 본 사람이 많지 못하였다.

착한 일을 많이 하여도 신분이 비천하여 마침내 이에 이르렀으니 아! 슬프도다.

범인들의 마음은 하는 바가 있어서 선을 하는 자는 능히 오래 가지 못하니,

혹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도 나중에는 게을러지고, 혹 어려서는 어질다가도

늙어서는 어기어지고, 심한 자는 하루 이틀 사이에 또한 혹 변하고 바뀌는데,

하물며 삼년이겠으며, 하물며 일생을 마칠 때까지이겠는가?
순은 팔십이 다 되어 죽었는데 그때까지 그 마음은 한결 같았으니, 나는 그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알겠다. 세상에서 재주 있는 사람이나 이름난 벼슬아치들도 그 마음이

누구인들 아름다운 이름을 따내어 일세를 빛내고자 하지 않으랴마는, 그러나 또한

능히 하는 이는 드무니, 곧 그 재주와 식견이 미치지 못하여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순이여! 천성적으로 얻어서 마음에 따라 지킨 것을 잃어버리다니 애석하도다. 순이여!

몸은 초목과 더불어 같이 썩었도다. 황천이 어둡고 어두우니 누가 어두움을 끼쳤던고?

 순은 세 아들과 여덟 손자를 두어 심히 번성하니 일찍이 덕을 심은 효험이었던가?

내 감히 대략의 앞뒤를 서술하여 어진 사또에게 드리니 사또의 선을 좋아함이 진실 된

지라 내 생각에 배순은 영영 없어짐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당시에 사또는 창석(蒼石)이었다. 당음(棠陰 : 어진 지방관이 정사를 펴는 곳)에 아뢰

어서 다시 조정에 보고하여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단곡(丹谷) 곽진(郭 山+晉) 짓다.
- 곽진(郭 山+晉), 『단곡집(丹谷集)』

출처 : 영주문화유산보존회
글쓴이 : 진실하고 당당하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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