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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영주 관광

[스크랩] 금성대군의 난

순흥안씨의 세거지인 순흥(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서 큰 사건이 있었으니

'금성대군의 난'이다.

 

세조 2년(1456년 丁丑),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이

금성대군(세종의 여섯째 아들)과 밀의하여 단종을 복위시키려던 사건이다.

시비(侍婢) 김련(金連)이 내통하던 관노와 짜고 격문을 훔쳐 고발하여

큰 출세하려던 것을, 시비는 즉시 잡아 가두고 한양으로 향하던 관노를 좇아

풍기현감 김효급이 역마 세 필로 추격하여 경기도 장호원에서 관노를 체포했다.

 

풍기현감이 격문을 빼앗아 불태우려 하자,

"그 격문을 가지고 한양에 가서 고발하면 경상감사가 될 터인데, 왜 태우려 하십니까?"

풍기현감 김효급은 마음이 변하여 안동으로 달려가 안동부사 한명청(한명회의 6촌)에게

고발하였다. 

한명청은 순흥을 들이쳤고 또 한양에서 철기부대가 내려와 순흥을 짓밟았다.

순흥은 피바다가 되었고, 순흥부는 불바다가 되었으며, 남녀노소를 역적이라고 무참히

타살하였다. 흐르는 피가 죽계천을 흘러, 십 리 아래 '피끈이마을(안정면 동촌동)'까지

이어졌다 한다.

순흥 호족이였던 안씨들은 죽임을 당하고, 피신했던 일가들도 근 100년을 순흥에

드나들지 못했다.

 

단종의 왕호가 회복되고, 역신으로 몰렸던 인사들이 복권된 것은 숙종 30년(1704년),

금성대군의 사건이 난 후 242년 후의 일이다.

금성대군의 사건 때, 순흥에 큰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1629년 화재로 반소되어

높이 10척이 남고 껍질도 타버려 나무 둥치만 남아 있었다. 어떤 술사(術士)가

나무 밑을 지나며 "이 나무가 살아나면 순흥이 반드시 복고(復古)되리라."했다.

50년간 죽었던 은행나무가 살아나고 푸르게 되더니

단종의 왕호가 회복되고 흥주(순흥)가 복원되었다

이 나무가 '전설의 은행나무'이고, 은행나무 뒤에 금성단(錦城壇)을 건립하여

금성대군과 억울하게 당한 의사(義士)들의 넋을 달래는 제사를 모신다.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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