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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영주 관광

[스크랩] 순흥 초군청

순흥 초군청

고려시대에는 국방경비를 위하여 주(州), 현(縣)에 초군(樵軍)을 두었다.
또 나무꾼을 초군(樵軍)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순흥에 있었던 초군(樵軍)이라 하는 것은 농사군을 뜻하는 것이다.
순흥은 예로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의 요충지대요,
역사적 사건과 명승고적이 많은 지방이며 순흥도호부가 설치된 곳이다.
관아(官衙)의 관원들과 관직을 마치고 돌아온 전관,
생활이 부유한 세도가들이 많았다.
세도와 권력등은 이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세도와 권력을 업어서 부내(府內)에 있는 농민, 서민, 일꾼 할것없이
인근 동리나 가까운 인근지역인 안정, 단산등에서 2일 7일에 서는
순흥장날 장을 잘 볼 수 없을 정도로 권력과 횡포가 심하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고,
이 사람들은 소백산에 나무를 하러가면 산밑에 있는 주막에서 종일 술을 마시고 놀다가,
해가 질 무렵 주인의 승낙도 없이 나무가리를 뜯어지고 돌아오는 것은 예사요,
만일 주인이 시비를 하였다가는 촌사람이 순흥장은 다 보았으니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이런 예는 비일비지 하였다.
농군의 행패는 부사도 처리가 힘들었다.
농군이라도 관아에 일하는 관원의 친족이 아니면 구관,
세도있는 집들 일꾼들이니 포졸들을 시켜 잡아들이니
당장 내일 모를 심어야 하고 김을 매야하는 세도집 상전의 구명운동이 벌어지고
이것도 한두번이어야 관에서도 선처하겠지만 번수가 잦으니 피차 난처하게 되었고,
세도집에서도 큰 고충이 아닐수 없었다.
물론 일반 인근 주민의 비난은 대단하였음은 말할나위도 없었고
관가에 송사는 끊일 날이 없었다.
이 농군들의 횡포를 늘 걱정하고 이를 선도해 보려고 애쓴분이 있으니,
이는 의성(義城)인으로 개암(開岩) 우굉(宇宏)의 후손으로서
김교림(金敎林)이라하며 고종(高宗) 때 진사(進士)였다.
부친이 객지에서 비명횡사하므로 초상을 치루는
즉시 고인이 입었던 피붇은 옷을 입고 상경(上京)하여
널리 알려 원수를 찾아 죽이니. 효(孝)로서 참봉(參奉)을 재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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