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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영주 관광

[스크랩] 순흥 봉서루

순흥 봉서루

옛날에 순흥은 한산한 고을이었다.
하루는 지리에 능통한 이인이 지나다가 지형은 번성할 곳이나
앞이 너무 허해서 순흥의 진산인 비봉산의 봉이 남쪽으로 날아가
이곳이 흥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것을 듣고 있던 고을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자,
남쪽에 큰 누각을 짖고,
오동나무를 심어 봉이 못 가도록 알을 만들어 두면 이 지방이 흥하고,
명인이 많이 날 것이라고 하고, 사라져 버렸다.
고을 사람들이 너무 이상해서 서로 수의를 거듭한 결과,
읍에서 남쪽 1.5㎞ 되는 곳에 큰 누각을 짓고, 봉서루라고 이름하고,
그 옆에 흙을 쌓아 봉의 알을 세 개 만들고,
누각 앞에 오동나무를 많이 심어 두었다.
몇년 안가서 이인이 말한 대로 글 잘하는 선비와 이름난 무인이 나고,
또 고을이 번성하게 되었다.

수 백년이 흘러 일제시대가 되어,
새로운 교육제도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되었다.
1910년경에 보통학교를 공청(公廳)을 이용해 세우게 되었다.
1927년경에 와서는 6년제 보통학교가 12학급이 되어
봉서루 상하층 두교실을 사용하고도 두 교실이 모자라게 되었고,
당시 면사무소는 옛날 동헌을 사용했으나 너무 헐어서 개축을 해야 될 판이었다.
지방 유지들이 봉서류와 문루를 합해서 면사무소를 짓고,
순흥 보통학교에는 동편으로 4개 교실을 연장해서 동서로 길게 짓기로 했다.
그래서 3월에 봉서루를 헐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날 밤에 목수가 꿈을 꾸니 봉서루에서 큰 봉이 날아 자기 앞에 와서
"너는 왜 내가 천년동안 살아온 집을 허느냐?
만일 네가 중지하지 않으면 큰 변을 당할 것이다. "
하고 가는 것이었다.
꿈을 깬 다음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발설도 아니하고, 봉서루를 다 헐었다.

12개 교실 동쪽편의 교사에 목수칸을 만들고,
거기에 교실지을 나무를 많이 갖다 놓고 대패질을 하다가,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담배불이 대패밥에 붙어
그 불이 천정을 통해 12개 교실 서편부터 연기가 나면서 동시에 불이 붙게 되어
학생들이 공부하다가 책보를 둔채 운동장으로 뛰어나와
책도 다타고 학교의 비품도 다 타버렸다.
순흥, 풍기, 영주의 소방차가 왔으나,
너무 화력이 강해서 소방호스의 물이 화열을 뚫지 못하고,
다시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봉서루 앞에 큰 오동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그 생나무에 불이 붙어 타고 말았다.
그 나무 속에 있던 봉서루를 지키던 큰 구렁이도 타죽고 말았다.

그후 순흥 보통학교는 지방민의 여론에 따라 읍내로 옮겨지고,
봉서루는 현재의 면사무소 옆에 우뚝 솟아 있으나,
순흥은 인물도 나지 않고,
지방의 번영이 점점 쇠해만 가고 있다.
봉서루는 최소한 800년은 되는 해묵은 건물이라고 생각된다.
유명한 안축선생의 중수기가 그것을 말해준다.
오늘날 주민들은 모두 그때 봉서루를 헐어 옮긴 것을 후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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