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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영주 관광

[스크랩] 순흥과 압각수

순흥과 압각수

순흥에서 부석쪽으로 1km정도 되는 길 오른편에 유서 깊은 소수서원이 있고,
조금 지나면 죽계천을 건너는 다리 제월교가 있는데 이것이 옛 순흥의 청다리이다.
이 청다리 못 미쳐 왼편 100m되는 곳에 금성대군의 위패를 봉안한 금성단이 있다.

금성단 뒤 서쪽에 숱한 사연을 간직한 압각수 한 그루가 우람차게 서 있다.
이 압각수(은행나무)는 지역 주민들로부터 신목으로 불리며,
받들고 있는데 수령이 약 1,100년이고,
높이는 30m나 되며, 밑둥치 둘레는 현재 6m정도 되지만
남아 있는 뿌리 부분의 흔적으로 봐서 옛날에는 훨씬 더 컸을것으로 추정된다.
수형은 위로 힘차게 높이 뻗어 일부분 고목이 되어 불타 없어지거나,
썩어 속이 비기도 하지만 수백년 묵은 가지들은 오랜 연륜을 느끼게 하고,
그 우람찬 모습과 위용이 대단하다.

이 압각수는 조선 세종의 여섯째아들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운동과 관련한 파란많은 역사적 사실을 지켜보며
순흥의 흥망 성쇄를 같이 해온 역사적인 나무라고 할수 있다.
영주 향토지에 기술된 내용에 의하면
1457년(세조3년) 정축지변이 터지자,
이 나무가 스스로 고사했으며
1629년에 불에 타고 일부분이 남아 있었는데
한 술사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말하기를
'흥주(순흥)가 폐하니, 이 은행나무가 죽고,
이 나무가 살면 순흥부로 다시 될것이라'고 하였는데,
그후 1643년에 과연 이나무에 생기가 돌아 껍질이 생기고,
가지와 잎이 돋아나기 시작하여 1682년에는 무성해지고
이듬해에 순흥부로 환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성대군은 지금으로부터 539년 전인 1456 (세종3)에
사육신의 단종복위 운동에 연류 되어 순흥으로 유배당해
압각수로부터 서쪽 500m 되는 곳에 위리 안치되었다.

그 이듬해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한 관소의 밀고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 안동부사 한명진과 그 군졸들에게 체포 압송되어
안동에서 최후를 마쳤다.
순흥은 역모지라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 살육되어 쑥밭으로 변해버렸다.
순흥부는 폐부되어 풍기군에 병합되어 버렸던 것이다.

수많은 순흥부민들이 살육되어 그 흘린 피가
죽계천을 흘러 10여리나 떨어진 지금의 안정면 동촌마을까지 흘렀다고 해서
그 마을을 지금까지 "피끝" 이라 부르게 되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금성대군이 세조에 의해서 한많은 세상을 떠난 그해부터
2백여년 동안 죽은듯이 있다가 1683년 (숙종9)에 이르러 단종이 복위되고
순흥부로 다시 승격되어 금성대군과 제의사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석단(石壇)을 모으자
이 압각수도 새순이 다시 돋아나 지금에 이르는 거목으로 자라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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