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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엔 끝이없다.^^*/한국사 이야기

한반도의 신기神器 다뉴세문경

한반도의 신기神器 다뉴세문경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만들어진 청동거울은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청해성靑海省의 귀남貴南에서 출토한 직경 6cm 정도의 작은 거울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거울 뒷면에 기원전 1천 년 대에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거울에서 보이는 삼각집선문三角集線文이 똑같이 장식되었다는 점이다.

청동거울의 기원과 심리적 제일성에 기인한 유사성
한반도의 청동거울은 뒷면에 두 개 혹은 세 개의 꼭지가 달리고, 기하학무늬가 장식된 것을 주요 특징으로 하므로 다뉴경, 다뉴기하학문경, 다뉴세문경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 초기형은 무늬가 거칠어 조문경粗文鏡이라고 하는데 기원전 8세기 전후하여 요하遼河 상류와 대릉하유역에서 발견되었다. Z자가 연속하여 장식된 번개무늬를 모티브로 한다. 중국 청해성의 예와 유사한 것은 기원전 4~3세기경 등장하는 그 다음 형식의 조세문경粗細文鏡으로서 요동과 한반도에 걸쳐 분포하는데, 대동강유역의 전 맹산 거푸집, 금강유역의 부여 연화리 등지의 예가 있다. 부여 연화리의 예 또한 직경 10cm 정도의 소형으로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끈으로 매달기 위한 꼭지가 중국거울은 그 한가운데에 한 개인 것과 달리 한쪽에 치우쳐 두 개가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무늬의 유사성은 우연일까. 실제로 두 거울이 발견된 위치는 수천km 떨어져 있으며, 시간은 2천 년 차이가 나므로, 상호 관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각형의 내부를 여러 평행선으로 채운 도형을 똑같이 사용하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갖는 심리적 제일성齊一性에 기인한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거울이 갖는 기능과 관련된 상징성, 그것은 햇빛 반사라는 물리적 현상을 신의 뜻으로 이해하고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중국의 청해성 귀남 거울이나 한국의 부여 연화리 거울은 바깥쪽으로 빛을 발산하는 형상으로 무늬가 구성되었으며, 기원전 3~2세기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세문경의 거울 또한 그 외구外區의 디자인은 이를 따르고 있다.

청동거울의 외형 및 무늬
앞서 말한 청해성의 예 말고도 은나라 왕비 부호婦好의 무덤에서 역시 기하학무늬 동경이 출토된 바 있지만, 기본적으로 중국의 고대동경은 고대신화나 전설에 등장하는 용 등의 사신이나 괴수, 복희와 여와 등을 형상화한 구상계열이 주요모티브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고대신앙, 도교사상이나 신선신앙과 관련된 것으로 한반도에서 이러한 모티브의 동경이 기하학문경을 대체한 것은 기원전 1세기 한漢의 진출 이후이다. 바꾸어 말하면 삼각집선문의 기하학무늬가 중국 거울이 수입되기 전까지 기원전 1천년기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동북아지역에서 유행한 거울에 지속적으로 주요 모티브인 것이다.
그 모티브는 기원전 3세기 이후 한반도에서 발견된 세문경에서는 더욱 절정에 달한다. 10~20cm 내외의 지름을 가진 거울 뒷면을 동그라미 선으로 3대 혹은 2대 구분을 하여 외구外區, 중구中區, 내구內區 혹은 외구와 내구를 구획한 다음 각 구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삼각집선문을 채워 놓는다. 외구에는 꼭지점을 상하 엇갈린 방식으로 삼각집선문을 장식하고, 내구와 중구에서는 사각문을 대각선으로 구획하여 생성한 여러 개의 삼각문으로 구성하였다.
그 사각문이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다양한 무늬구성을 연출하는데, 장인 집단마다 각기 다른 구성 원리를 선택한다. 그 무늬를 장식한 수법이 최고도로 발달한 것이 기원전 2세기 전후하여 한반도에서 등장하는 다뉴세문경으로, 원형거울의 둘레에 단면이 반원형인 테두리를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거울의 외형은 활석제로 만든 거푸집에 주물을 부어 제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대동강유역의 맹산이나 성천, 그리고 영산강유역의 영암 등지에서 발견된 거푸집 실물을 통해서 확인된다.

현대인에게도 쉽지 않은 주조기술
그러나 거울 뒷면에 세선으로 촘촘히 채워 놓은 장식문양은 석제 용범으로써는 도저히 연출하기 어렵다. 거울의 한가운데를 중심점으로 하여 콤파스로 그린 여러 줄의 동그라미와 길이 1cm도 되지 않는 사각형, 삼각형의 내부 빈 공간에 20여 개의 세선을 채워 표현한 수법은 지금의 숙련된 제도가도 쉽게 엄두내지 못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외구에 지름 2cm가 채 되지 않는 동그라미 내에 20여 개의 동심원을 그린 수법은 경이롭기까지 한데, 이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자세를 갖춘 숙련된 장인이 아니면 만들어내지 못할 작품이다. 최근에 한 전문연구자가 충남 논산에서 출토하였다고 전하는 숭실대 박물관 소장의 국보 다뉴세문경의 무늬를 그대로 재현하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고 할 정도이다.
그것도 뾰족한 금속제 바늘모양 도구로 직접 새긴 것도 아니고 주물을 부어 만든 것이다. 1단계에는 불에 녹는 밀납 등의 고형물질에 무늬를 새긴 다음, 고운 모래가 섞인 점토로 발라 구워 형틀을 만들고, 이 형틀에 청동의 주물을 부어 제작하는 복잡한 공정을 거친 것이다. 크기 자체가 작은데다가, 그 두께가 수mm 밖에 되지 않는 거울이기 때문에 무늬를 그리는 작업 못지않게 주물 제작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실제로 숭실대박물관 국보 세문경의 세부를 관찰하여 미세하지만 주물이 한쪽으로 밀려 무늬가 중첩되고, 고운 모래흙이 남아 있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주물기술의 절정, 다뉴세문경
청동은 구리, 주석, 납, 아연 등의 합금이다. 국보경을 통하여 분석한 결과 그 합금비율이 구리 61~62%, 주석 31~32%, 납 5~6 %이라고 한다. 이처럼 다뉴세문경은 중국의 고대문헌인 주례 고공기周禮考工紀에서 보이는 거울의 구리 대 주석의 이상적인 합금비율인 67:33에 가까운 수치를 보인다. 그것이 반드시 중국의 합금기술을 전수받은 것이라기 보다는 기원전 1천년기 초부터 축적된 청동제작기술 노하우를 바탕으로 이룩된 것으로 그 주물기술의 절정에 다뉴세문경이 있는 것이다.
조문경, 조세문경, 세문경 포함하여 다뉴기하학문경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반도에 걸쳐 그 실물이 90여 점 발견되었다. 그 대부분은 전부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든 무덤의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그중에서도 비파형동검과 함께 다량의 청동기를 부장한 무덤은 압록강 너머 요하 서쪽에서부터 확인되는 바, 대릉하 유역의 조양朝陽 십이대영자十二臺營子 유적이 대표적이다. 요동지역으로 와서는 심양沈陽의 정가와자鄭家窪子 무덤이 있는데, 동검과 동경은 물론, 각종 무기와 마구, 장신구, 의기가 다량 매납되었다.
한반도에 내려와서는 발굴조사를 통해서 거울과 함께 다량의 청동기가 부장되기 시작한 것은 비파형동검 뒤에 등장하는 세형동검의 단계이다. 금강유역의 대전 괴정동, 아산만지역의 아산 남성리에서는 구덩이를 파고 목관을 안치한 기원전 4~3세기경의 적석목관묘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남성리의 경우 10여 점의 동검과 함께 방패형동기, 나팔형동기, 원형뚜껑모양의 청동기가 함께 부장되었는 바, 무덤시설이나 규모는 보잘 것 없지만, 묻힌 사람이 상당한 위세를 과시하는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동경이 가장 발전한 세문경 단계의 무덤에서의 출토상황을 잘 알려주는 것이 1980년대 전반에 알려진 영산강 유역의 함평 초포리와 화순 대곡리 유적이다. 함평 초포리 유적은 지역주민이 길을 내다가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구릉사면에서 거의 바닥만 남겨진 상태로 조사되었다. 당시 국립박물관에 재직한 현 이건무李健茂 문화재청장이 현지에 급파되어 구제발굴 조사를 통하여 발견한 것은 바닥에 남은 검과 거울 등 몇 점뿐이었다. 그렇지만 나중에 주민이 수습한 것을 맞추어 본 결과 총 4점의 동검, 3점의 동과, 2점의 동모 등의 무기, 각종 청동 방울 세트, 그리고 크고 작은 세문경 3점이 부장되어 한반도에서 가장 많은 청동기가 한 무덤에서 쏟아져 나온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우두머리’, ‘장’을 상징하는 청동기
화순 대곡리 무덤 유적에서도 동검, 동경과 함께 청동방울이 나왔는데, 쌍두령雙頭鈴, 간두령竿頭鈴, 이두령二頭鈴 그리고 팔주령八珠鈴 등 크게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전부 1쌍 1조를 이루고 있어 양손에 쥐거나, 갖고 흔들게 되어 있다. 흔들어 소리를 내서 신을 부르는 제의祭儀에 직접 사용되는 무구巫具인데, 동 무덤의 주인공이 제사를 주재하는 종교적 리더임을 추정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이들 무덤유적이 위치한 지리적 위치를 보면 완만한 구릉사면과 저평한 대지가 발달한 곳으로 쌀을 비롯한 각종 작물을 재배하는 농사가 크게 보급된 지역이라 추정된다. 작물 농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하늘이기 때문에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제천행사 때 지역집단의 구성원 대부분이 참여하였을 것이며, 그 제의를 주재할 때 사용했던 제사장의 도구가 무덤에 부장된 앞서의 청동방울 무구인 것이다. 청동방울을 가진 우두머리가 주관하는 제의행사는 결국은 일정한 산천 경계를 지역 단위로 한 농업공동체 구성원의 결속을 도모하는 장이 되기도 했다.
다뉴세문경이 영산강유역을 비롯하여 한반도 전역에 성행하는 시기에 마한馬韓을 비롯한 삼한의 소국小國이 형성되었다고 많은 학자들이 주장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함평 초포리나 화순 대곡리와 같이 동경과 청동방울을 포함한 다량의 청동기를 내는 무덤의 주인공은 소국의 우두머리, 군장 혹은 족장일 수밖에 없다.
같은 단계에 청동방울은 없지만 세문경과 함께 다량의 청동무기가 부장되어 무덤의 주인공이 신의神意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무력적 실력을 갖춘 세속적인 지배자임을 시사하는 무덤의 예 또한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20여개 소가 확인된 바 있다. 청동방울과 같은 제의도구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이들 무덤의 주인공이 제사장으로서 강력한 지위를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그러나 이들 무덤 주인공은 모두 일정지역을 단위로 한 소국 혹은 적어도 소국을 구성하는 읍락의 우두머리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 글ㅣ이청규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