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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와 어보의 차이점은?

국새와 어보의 차이점은?

국새는 실무용, 어보는 의례용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 조선의 임금이 사용한 '국새'(國璽) 실물이 처음으로 확인돼 관심을 끌고 있다.

임금의 도장은 보통 국새 혹은 어보(御寶)라 칭한다. 이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확보한 고종황제의 도장은 어보가 아닌 국새다.

국새는 실무용, 어보는 의례용이라는 차이를 갖고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확보한 고종황제의 국새도 이탈리아 황제 등에게 보낸 서찰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의 임금들이 문서에 도장을 찍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국새의 활용도는 매우 높았다. 옥새(玉璽), 국인(國印), 새보(璽寶), 대보(大寶), 어새(御璽) 등 다양한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상서원'이라는 관청에서 보관했다.

국새는 국가의 권리와 정통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왕위 계승 또는 국가 권력 이양의 징표로서 사용됐다. 도장에는 성격에 따라 '조선왕보'(朝鮮王寶),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어새'(皇帝御璽), '시명지보'(施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라는 글씨를 새겼다.

손잡이의 형태는 거북이나 용모양이고, 조각기법이 섬세하고 정교하다. 금과 은의 성분은 41:57. 무게는 실무용이기 때문에 높이 4.6㎝, 무게 794g이었다.

반면 어보는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한 '의례용'이기 때문에 왕이 생전에 사용한 도장은 아니다.

의례용으로만 사용됐기 때문에 별다른 별칭도 없으며 상서원이 아닌 종묘 신실에 보관됐다. 또한 왕실의 영원한 대를 이어간다는 영속성을 담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도장에는 왕이나 왕비의 존호(尊號), 시호(諡號), 휘호(徽號) 등을 새겼다.

손잡이의 형태는 용이나 거북을 사용했으며 실제로 왕이 사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높이는 9.6㎝, 무게도 4㎏에 달할 정도로 매우 컸다. 주요성분은 금 대신 구리와 은을 54:23으로 혼합했다. 국새에 비해 크기가 커 조각선이 굵고 덜 정교하다.

국립고궁박물관 관계자는 "이번에 발견된 국새는 주로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했다는 점에서 어보가 아닌 국새"라며 "국새는 공문서에 사용할 때 '대한국새' 혹은 '황제지보' 등으로 불리웠고, 친서에 사용할 때는 '황제어새'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는 등 사용처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어보는 어보로만 불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에 발견된 국새에 '황제어새'라는 글씨가 새겨진 점으로 미뤄 비밀리에 제작돼 고종황제가 직접 소지하고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원래 국새는 상서원에서 관리하는 것이 상례이나, 황제가 이 국새를 직접 소지하고 관리한 점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긴장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buff27@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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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국새' 어디로 사라졌나

고종 국새 6점 1910년 종적 감춰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고종 재위 13년째인 1876년 11월4일, 경복궁 교태전이 화재로 소실됐다. 이 화재로 이곳에 보관하던 국새(國璽)와 같은 '임금님 도장' 또한 대부분 소실되거나 손상됐다.

이에 고종은 나흘 뒤에 "화재로 소실한 옥새(玉璽)와 인장(印章)을 새로 만들도록 하라 "는 지시와 내린다. 이때 고종은 옥새와 인장을 "다시 주조하고 만들되 수리하는 일은 본소(本所. 무위소 < 武衛所 > )와 호조(戶曹)에서 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첨부했다.

보인(寶印) 즉, 임금이 사용하는 각종 도장은 원래 호조에서 제작을 담당했으나, 고종은 재위 11년(1874)에 이르러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으로부터 실질적 통치권을 넘겨받은 뒤 이 일을 자신이 창설한 군대조직인 무위소(武衛所)에 맡겼던 것이다.

교태전 화재와 더불어 진행된 새로운 보인 제작의 상세한 과정은 장서각이 소장한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라는 기록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새로운 보인은 그 해 12월27일까지 모두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 만든 '임금님 도장'을 보인소의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대보(大寶) ▲시명지보(施命之寶) ▲유서지보(諭書之寶) ▲세자궁옥인(世子宮玉印) ▲조선왕보(朝鮮王寶) ▲대조선국주상지보(大朝鮮國主上之寶) ▲소신지보(昭信之寶) ▲이덕보(以德寶) ▲과거지보(科擧之寶) ▲선사지기(宣賜之記) ▲무위소(武衛所).

이때는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이었으므로 황제가 아닌 '조선왕'의 신분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각종 도장을 만들어 사용한 것이다.

그러다가 고종은 1897년에 이르러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그가 사용하는 각종 도장 또한 황제의 위상에 걸맞게 새로 만들어야 했다. 이때 새로 제작한 '황제 도장'은 모두 13과였음이 그의 황제 즉위과정을 파노라마처럼 기록한 '대례의궤'(大禮儀軌.1897)라는 문헌에 보인다.

그 13과는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지새(皇帝之璽), 황제지보(皇帝之寶), 칙명지보(勅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시명지보(施明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 원수지보(元帥之寶) 등이었다.

이 중 고종황제가 외국 원수에게 친서 등을 보낼 때 직접 사용한 국새는 대한국새와 황제지새, 황제지보 등 3과였으며, 나머지는 황제가 국내 신민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군통수권을 행사할 때 사용한 도장이었다.

고종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 신분이 '조선왕'이건 대한제국 '황제'건 관계없이 조선시대 군주는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많은 국새를 제작해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했다. 조선왕조 500년 기간에 27명의 왕이 사용한 국새는 그 정확한 통계수치는 없지만 엄청나게 많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의아하게도 지금까지 조선시대 국새는 단 1점도 실물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의문과 관련해 국립고궁박물관 등이 상설전시품으로 내놓은 '임금님 도장'은 도대체 뭐냐는 의문을 표시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도장들은 '어보'(御寶)라고 해서 종묘의 신실(神室), 즉, 각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공간에 안치한 의례용 도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어보는 실무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어보 무게가 대체로 4㎏ 안팎에 이르는 대형인 까닭은 이런 비실용성에 기인한다.
그 많던 국새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는 의문을 증폭시키기만 한다. 혹여 각 왕릉에 매장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다만 고종의 국새가 어디로 갔는지는 그 단서를 포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순종실록 1910년 3월3일(양력) 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차관(次官)인 고미야 사보마쓰(小宮三保松)라는 사람이 "옛 국새(國璽)와 보새(寶璽)를 총독부에 인계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역을 이 순종실록은 대한국새 1과, 황제지세 1과, 대원수보(大元帥) 1과, 제고지보 1과, 칙명지보 1과, 칙령지보(勅令之寶) 1과로 적었다.

이 국새들은 현재 행방이 묘연하다.
때문에 국새를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됐다. 심지어 고종의 잃어버린 국새 찾기를 소재로 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한반도'가 제작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국립고궁박물관이 고종황제의 국새를 입수한 것이다.
박물관은 그 입수 경로를 해외문화재 환수 일환이라고만 밝히고 그 자세한 사정을 공개하지는 않지만 지난해 12월 재미교포에게서 구입하고 지금까지 약 3개월 동안 그 진위를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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