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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 발굴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 발굴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 발굴
(서울=연합뉴스)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의 손잡이 부분인 거북이형 손잡이. 이 국새는 전체 높이 4.8cm에 무게는 794g이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며 비단실로 짠 끈이 달려있다.(왼쪽)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유리원판사진 중 국새와 이를 보관하는 내함과 외함. 고종황제 국새를 구입한 직후 지금까지 약 3개월에 걸친 관련 기록 검토와 유물 분석 등의 과정을 거쳐 이 유물이 바로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가운데)으로만 전해지던 분실된 고종황제의 국새임이 확인됐다.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의 몸체 바닥면. 이 국새는 전체 높이 4.8cm에 무게는 794g이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며 비단실로 짠 끈이 달려있다. 정사각형 인장면(도장을 찍는 면)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글자를 양각(陽刻.돋을새김)했다. 2009.3.17 << 국립고궁 박물관>>


고궁박물관 "조선왕조 유일한 국새"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금까지 단 1점도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보고된 조선왕조 임금의 실무용 도장인 국새(國璽)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은 17일 오전 이건무 문화재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박물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12월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현존하는 유일한 대한제국시대 국새이자 조선왕조의 유일한 국새를 구입했다고 발표했다.

   박물관은 이 국새를 구입한 직후 지금까지 약 3개월에 걸쳐 관련 기록을 검토하고 분석한 결과, 이 유물이 바로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사라진 고종황제의 국새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국새는 외함은 분실되고 보통(寶筒)이라 일컫는 내함과 함께 입수됐다. 국새는 전체 높이 4.8cm에 무게는 794g이었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며 비단실로 짠 끈이 달렸다. 정사각형 인장면(도장을 찍는 면)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글자를 양각(陽刻.돋을새김)했다.

   내함은 황동(黃銅)으로 3단으로 만들어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을 수 있게 했으며, 그 윗단에 국새를 넣었다. 나아가 뚜껑은 네 면을 경사지게 꺾어 마무리했다.

   하단과 뚜껑 내부는 붉은 비단을 직접 접착해 마무리했으나 국새가 들어가는 상단은 두께 0.5cm의 소나무로 내곽을 만든 뒤 붉은 천을 붙여 마감했다.

   고궁박물관이 국새 성분을 분석한 결과 은(銀)과 금(金) 비율이 거북형 손잡이는 81:18인 반면, 몸체는 57:41로 나타나 손잡이와 몸체를 따로 제작해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박물관 측은 "고종이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황제에게 보낸 10여 통의 편지에서 사용한 황제어새로는 두 종류가 확인됐지만 이에 사용한 도장 실물은 사라진 것으로 간주됐으며, 그 중 1점이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남아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었다"면서 "이 국새가 바로 유리원판 사진으로 남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확인한 국새는 "그 제작기록이 보이진 않지만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광무 5년 11월 16일)의 기록 등으로 미뤄 1901-1903년 무렵에 제작됐으며, 1903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에는 모두 27명에 이르는 임금이 있었으며 이들 임금은 모두 국새라는 실무용 도장을 무수히 제작해 공문서나 친서 등에 사용했지만, 그 실물은 단 1점도 남아있지 않았다.

   고궁박물관을 비롯한 국내외 일부 기관이나 개인이 소장한 '임금님 도장'은 모두 어보(御寶)라 해서, 그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한 '의례용'일 뿐이며, 왕이 생전에 실제로 사용한 국새는 아니다.

   이런 중요성을 고려해 고궁박물관은 이 국새에 대한 국보 지정절차를 밟기로 했으며, 그와 동시에 일반공개도 하겠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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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친서에 사용한 휴대용 국새

2종류 중 1점 국립고궁박물관 발굴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광무 10년(1906년) 1월 경운궁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적은 친서를 독일황제 앞으로 보냈다.

"짐은 대덕국(大德國.독일)의 호의와 지원을 항상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짐에게 파국이 닥쳐왔습니다. 이웃 강대국(일본)의 공격과 강압성이 날로 심해져 마침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독립을 위협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짐은 폐하께 고통을 호소하고 다른 강대국들과 함께 약자의 보호자로서 본국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폐하의 우의를 기대합니다. 이렇게 된다면 짐과 조선의 신민은 귀하의 성의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을 하늘에 두고 맹세합니다. 광무 10년(1906년) 1월 경운궁에서. 폐하의 좋은 형제."

누란의 위기에 처한 고종의 절절한 위기감이 묻어난다.
이 친서는 희한하게도 두 종류가 전한다. 하나는 초고본인데, 실물은 행방이 묘연하고 그것을 찍은 사진만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유리원판에 남아있다.

이 초고를 토대로 고종황제는 일부 문구를 손질해 독일황제에게 친서를 발송했다. 이 최종 완성본 고종의 친서는 현재 독일에 소장돼 있으며, 최근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원본을 촬영해 왔다.

이 두 종류의 친서에는 모두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국새가 찍혀있다. 이를 감정한 한국서예사 연구자이자 인장 전문가인 손환일 박사는 "두 국새는 같은 종류"라고 말했다.

고종황제가 독일황제를 비롯한 외국 군주나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로 그의 국새가 찍힌 것으로는 현재까지 10여 통이 발견됐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이 친서들에 사용한 국새를 판별한 결과 2종류가 사용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것을 박물관은 '제1 국새'와 '제2 국새'라는 명칭을 부여해 구별했다. 이 두 국새에는 모두 '황제어새'라는 문구를 새겼다.

독일황제에게 보낸 친서에 사용된 것은 '제2 국새'에 속한다. 하지만 이 제2 국새는 아직까지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다.

고궁박물관이 지난해 12월 해외에서 구입한 고종황제의 국새는 '제1 국새'에 속한다.
이 '제1 국새'가 사용된 고종황제의 문서로는 현재까지 이탈리아 군주에게 보낸 친서(1903.11) 1통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낸 1904년 9월자와 같은 해 11월자 및 이듬해 4월자 친서 3통, 그리고 영국인 허치슨(Hutchison)에게 무슨 일을 재가한 문서(1906.10)가 파악됐다.

이번에 확보된 제1 국새는 물론이고 아직 종적을 찾을 수 없는 제2 국새는 기존 문헌에는 보고가 되지 않는 고종황제의 도장이다.

제1 국새는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에 그 실물 사진 몇 장이 남아 있어 국새의 진위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제1 국새는 그것을 보관하던 전체 상자인 외함은 소실되고 없으며 보통(寶筒)이라 일컫는 내함과 함께 입수됐다.

이 내함은 황동(黃銅)으로 3단으로 만들어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을 수 있게 했다.
이는 이 국새가 고종이 언제건 실무에 사용할 수 있게끔 제작한 '휴대용 국새'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