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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엔 끝이없다.^^*/한국사 이야기

한국의 매장풍습과 역사

한국의 매장 풍습과 역사


선사 시대


무덤은 사람의 사체를 매장한 시설물로, 동물 중에서 사람만이 주검을 매장한다.

사람이 죽으면 곧 부패하면서 악취를 풍긴다. 따라서 주검을 처리하는 방법을 강구했는데, 바위나 나무 위에 올려놓아 짐승과 새에 의해 처치를 맡기는 풍장(風葬), 물 속에 가라앉힘으로써 물고기에게 처리를 맡기는 수장(水葬), 사체가 급속히 부패하는 열대 지방의 화장(火葬)이 있다.

그 중에서 땅을 파고 묻어 버리는 매장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위생적이고 또 금수(禽獸)의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 또한 무덤(묘)은 죽은 자을 기억하는 사람에게 추모의 여지를 남겨 주는 기념적 형상물로써 보편화되었다.

고조선∼삼한 시대의 매장 형태는 토장묘, 토광묘, 지석묘, 석곽묘 등인데, 토장묘는 가장 먼저 발달한 무덤의 형태로 땅을 파고 사체를 매장한 것이다.

토광묘는 청동기 중엽의 매장 형태로 항아리 같은 대형 옹기에 사체를 넣어 매장한 것으로 주로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지석묘(고인돌)는 가장 독특하고 전통적인 무덤 형식이다. 구조는 지상에 커다란 돌을 괴어 올려놓은 것인데, 지상에 장방형의 네 벽을 세우고 그 위에 큰돌을 얹어 놓은 탁자형과 바둑판 모양으로 몇 개의 돌을 괴고 그 위에 윗 돌을 올려놓은 기반형으로 나뉜다.


삼국 시대

고구려

삼국 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또 광활한 토지를 가진 권력자들이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궁궐·저택·복식 등을 호화롭게 치장했다.

그에 따라 무덤의 형태도 전 시대와는 확연히 다르고, 특히 무덤을 '사자의 집'이라 생각하여 내부를 집처럼 꾸미거나 현세에서 부귀를 누린 자가 죽어서도 안락한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노비와 시종을 함께 매장하는 순장(殉葬)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또한 권력자가 쓰던 생활용품을 함께 매장하는 풍습도 있었다.

고구려 무덤은 적석총과 벽화 고분이 특징 이다.

적석총은 '돌무더기 무덤'으로 지면을 고른 다음 약 1m 정도의 단을 쌓고 그 위에 사체를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 분구를 형성한 것이다.

분구의 외형은 시대에 따라 계단식으로 3∼5단의 방대형 또는 절두방추형이 있다.

매장주체시설은 석관식에서 차츰 횡혈식 석실로 발전하였다.

벽화는 활석으로 석실을 쌓고 그 위에 회를 두텁게 바른 다음 그 벽면에 그림을 그린 것이다. 초기의 벽화 고분은 피장자의 초상화, 행진도, 수렵도 등 풍속도를 그리고, 중기의 것은 풍속도와 사신도(四神圖), 후기에는 주로 사신도와 장식 그림을 그렸다.


백 제

무덤은 그 주인이 이 땅에서 실제로 살았다는 사실이며 증거이다. 덕망 높은 정승도, 당대를 풍미했던 정치가도, 천하를 호령했던 장군도, 문필에 뛰어났던 학자도, 뭇 사내의 애간장을 태웠던 기생도, 개혁을 부르짖었던 혁신주의자도 모두 이 땅의 물을 마시고 살았다.

시공(時空)을 초월하면 우리와 똑같이 삶의 애증에 몸부림친 이웃이었다.

백제의 무덤은 수도를 이전함에 따라 서울, 공주, 부여의 것들이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공주의 무덤은 궁륭상천장의 횡혈식 석실이 송산리 지역에 분포하는데, 이것은 서울의 것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뜻한다.

또한 능산리의 왕릉을 보면, 풍수학에 입각하여 묘지를 선정하였다.

현무에 해당되는 뒷산을 주산(主山)으로 업고, 좌우에 청룡과 백호에 해당하는 산능선이 혈을 감싸고, 앞의 시야는 확트여 명당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부여의 횡혈식 석실의 주류는 평사천장형으로 지하 깊이 내려가기 때문에 배수에 신경을 쓴 흔적이 있다.


신 라

신라 무덤의 특징은 돌을 쌓아서 이루는 적석형식으로 적석봉

토분과 적석목관분이 주류이다.

6세기초에 이르면 경주 시내의 평지에 쓰던 무덤이 주위의 산기슭으로 옮겨지는데, 이것은 풍수 사상과 같은 제반 의식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통일신라 시대의 주류는 평지의 대형 분들과 같은 규모의 원형봉토분으로 호석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고려 시대

고려의 왕릉은 주로 개성 부근과 장단,강화 등에 산재한다.

일반적으로 언덕 아래쪽에 남향으로 위치하며, 좌우 측에 청룡과 백호가 언덕을 이룬 곳이다.

후방에 주산이 있고, 백호는 능의 전방으로 우회하며, 물은 능 우측의 시내에서 시작하여 능 앞을 흐르는 지세이다.

이것은 소위 풍수 상 길지로 인정되는 곳으로 풍수지리설 이 권력 지배층에게 널리 횡행했음을 의미한다.

고려 무덤의 특징은 횡구실 석실로 신라의 것과 비슷하나 막돌로 연도 없이 축조하고 평천장이다. 개성 부근의 왕릉들과 지방의 귀족묘들이 대개 이런 형식을 취하였다.

민간에서는 사체를 거적에 싸서 묻거나 목관을 사용해 묻었는데, 범위도 좁을 뿐만 아니라 관은 부자가 아니면 쓸 수조차도 없었다.

고려 무덤에서 보이는 특징은 풍수지리설이 매우 철저해지고, 또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 부장품이 박해진 점이다.

금은 옥석으로 만든 장신구 대신에 동경과 자기류들을 부장품으로 함께 묻었다. 이것은 불교의 생활화와 북방계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을 생각된다.


조선 시대

조선은 고려의 전통 위에 유교 사상이 가미되어, 석곽묘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석실도 거대한 석곽 또는 석관형으로 변하였다.

화장묘가 사라지고 중국식 토광묘가 일반화되고 풍수 사상이 더욱 보편화되었다.

부장품은 백자가 주로 이용되었고, 외형은 초기에는 원형과 장방형이었고 중기 이후에는 거의 원형분으로 정형화되었다.

묘비가 일반화되어 고관대작의 묘 앞에는 신도비가 설치되었다. 또 왕능은 풍수 사상의 일산일혈(一山一穴 )의 원칙에 따라 하나의 산등성에 하나의 능만을 안치했으나, 민간의 묘는 경제적 부담과 괸리의 편리성 때문에 한곳에 여러 기의 조상을 모시는 족장(族葬)의 형태가 널리 유행하였다.

조상을 숭배하고 그 무덤을 소중히 하는 의식인 유교로부터 배운 것은 다음 두가지였다. 첫째, 내 생명은 조상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므로 조상의 유택인 무덤을 잘 가꾸어 보존하여야 한다는 점. 둘째, 조상의 무덤은 효를 가르치는 산 교육장이라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무덤이 일찍부터 풍수사상과 결부되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비록 조상이 유명을 달리 했을지라도 그 시신을 명당에 묻어 자손과 연결된 좋은 기를 받아 발복을 한다는 것이 풍수사상이다. 이로인해 조선시대에는 조상을 명당에 묻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무덤싸움도 비일비재하였다. 또한 무덤을 정하는 일은 일반인이 함부로 할 수 없고 전문적 술사인 지관의 힘을 빌렸다.

풍수사상은 중국에서 비롯되어 삼국시대에 우리나라로 유입된 것으로, 특히 고려 건국에 간여한 도선과 조선 태조의 왕사로서 한양에 도읍을 정한 무학 등 주로 승려에 의해서 전승되다가 조선조에 들어서는 수많은 명사가 배출되어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은 유교식 매장법이 그대로 유행하여 원형 토광묘가 주류를 이루었다. 일제는 1912년 『묘지·화장·화장장에 관한 취체규칙』을 제정하여, 산이나 선영에 매장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대신 공동묘지를 설치해 강제로 매장케 하거나 화장을 권장하였다. 하지만 이 규칙은 공동묘지에 매장하면 공자(孔子)의 벌을 받고, 화장하면 영혼이 재생하지 못한다고 믿는 풍습 때문에 몰래 장사를 지내는 암장을 유행시켰다.



암장의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는 평장이다. 평장이란 자기 소유의 산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타인 소유의 산에 몰래 암장하고 무덤의 봉분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또 의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장차 묘를 만들 땅에 미리 묘를 만들어 두어 마치 오래된 묘처럼 보이게 했다가 때를 기다려서 몰래 그 속에 매장하는 것이다.

또 공장이라는 지능적인 방법도 동원되었다. 공장은 사람이 죽으면 딴 산야에 암장을 이미 하고, 공동묘지에는 관만 묻거나 관 속에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에 옷을 입혀 넣어서 정식으로 매장한 것 같이 하는 것이다.



일제시대 공원묘지에 묻힌 묘 중에는 이러한 공장이 많았다고 한다. 얼마나 풍수지리에 기인한 묘지신앙이 두터웠는지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일부 산간이나 도서 지방에서는 사체를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어두었다가 육탈 후에 매장하는 풍속이 있었으나, 당국의 강력한 단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현 대


현대는 무덤 형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장방형의 낮은 봉분, 봉분 둘레에 장대형의 호석을 두르는 등 원형분에서 다각적으로 모양이 변했다.

그러나 무덤의 내부는 여전히 토광의 전통법이 고수되고, 일제시대와는 달리 국토의 이용과 개발이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가족 묘지와 개별 묘지의 면적은 제한을 당하고, 공원 묘지가 일반화되는 추세이다.

매년 여의도 면적만한 국토가 묘지로 잠식당한다는 개탄의 목소리가 높더니, 드디어 지난해 1월 개정된 '장사등에 관한 법률'이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2001년 1월 13일 시행됨에 따라



1) 매장 기간은 15년씩 3번만 연장되고

2) 허락없이 남의 땅에 묘지를 쓴 경우 토지 소유자가 연고자에게 이장을 요구할 수 있으며

3) 개인묘지 면적이 기존 상한선의 3분의 1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즉 개인묘지는 24평에서 9평으로 줄고 집단묘지내 분묘는 6평에서 3평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화장을 장려하여 매년 화장율이 증가하더니 서울시의 경우 96년 30%에서 2000년는 55%로 늘었다.

사람들이 화장을 꺼려했던 이유로는 ★ 전통적인 관습으로 인해 ★ 두번 죽는 것 같아서 ★ 선산이 있으므로 ★ 종교상의 이유 ★ 조상을 잃는다는 허전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꾸준한 화장장려정책과 매장지가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화장이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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