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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엔 끝이없다.^^*/한국사 이야기

맹사성(孟思誠)과 흑기총(黑麒塚) 이야기..

고불 맹사성 영정
 
맹사성(孟思誠)과 흑기총(黑麒塚) 이야기..
 
맹사성은 조선시대 청백리의 표상이다.
조선 세종대왕때 정승을 지낸 맹사성 대감은 별명이 맹고불이었다.
그는 한성윤을 지낸 맹희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세종시대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명사성은 천성적으로 효성이 깊고 청백한 인물이었다.
그가 사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초라했으며 매양 출입할 때에 소를 타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은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성품이 청결하고 검소하며 살림살이를 늘리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했다고 한다.
맹사성은 부모를 찾아갈 때는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결코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하게
행차하고 때로는 소를 타기도 했다. 하루는 양성과 진위 두 고을 수령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엄하다. 한양에서 재상이 내려오시는데 어찌 시골 늙은이가 먼저 길을 가느냐?”
수령들은 허름한 농부 차림의 맹사성이 소를 타고 지나가자 하인을 시켜 꾸짖었다.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맹사성이 빙긋이 웃으면서 하인에게 말했다. 하인이 돌아와 고하자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그래서 이연못을 인침연(印沈淵) 이라고 한다.
 


흑기총(黑麒塚) ; 검은 기린의 무덤.
 
사람들은 검은 소의 무덤을 품격을 높여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양반 사대부 가문의 아마츄어 국악인이었던 고불 맹사성이 살아 생전에 타고 다녔던 검은 암소의 무덤.
맹사성이 검은 소를 얻게 된 배경에는 여러가지 설화가 전해 오지만 분명한 것은 산에 가던 길에 그냥 주웠다는 겁니다.
고불 맹사성은 한양에서 정승 벼슬을 하면서도 틈틈이 본가인 충남 온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날도 본가에서 책을 읽다가 무료하여 바람을 쐴 겸 집 뒤 설화산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산으로 들어서자 왁자지껄 소리가 나서 가 보니 어린아이들이 나뭇가지로 송아지만한 검은 짐승 하나를 두들겨 패면서 
장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네 이놈들, 말 못하는 짐승에게 웬 행패인고..." 야단을 치니 아이들은 도망을 가고 온몸에 나뭇가지로 맞은 자국이
남아있던  짐승은 그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다가 집까지 왔습니다.
집으로 돌아 온 맹사성이 짐승을 정성들여 보살피자 기운을 차리고 무럭무럭 자랍니다.
다 자란 짐승은 검은 암소였다고 합니다.
훗날 맹사성은 그 검은 암소를 타고 피리를 불면서 한양까지 오르내립니다.
고불 맹사성이 검은 암소를 타고 피리를 불면서 한양을 오갈적에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전해 옵니다.
 
고불은 평소에 유언으로, “내가 타고 다니던 그리마를 내 곁에 묻어다오.” 라고 하였는데, 평소
타고 다니던 소가 죽자 후손들이 맹고불 산소 윗쪽에 소무덤을 따로 만들어 그 유언을 따랐다 한다.
맹사성이 79세의 나이로 죽자, 그 검은소도 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주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다가 죽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은 맹사성의 묘 근방에 자리를 잡아 검은소도 묻어줍니다.
그리고 그 묘의 이름을 "흑기총(黑麒塚)"이라 하여 비석도 세워주고, 해마다 맹사성의 후손들은
성묘를 할 때면 흑기총의 풀도 깍아준다고 합니다.
 
소탈한 성품으로 많은 일화를 남긴 고불의 묘는 광주군 광주읍 직리 뒷산에 있다.
 
맹사성.(지정번호 경기기념물 제21호)
 
 
맹고부리 맹정승..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조선 초기의 재상으로 벼슬은 좌의정을 지냈으며 79세까지 장수하였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 본관은 충남 신창(新昌)이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지낸
희도(希道)의 아들이며, 최영(崔瑩) 장군의 손자사위이다. 1386년 문과 을과(乙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고,
춘추관 검열을 시작으로 조선조에 들어서는 예조 의랑을 거쳐 좌의정을 지냈다. 성품이 어질고 부드러우면서도
조정의 정사에는 과단성이 있었다. 사헌부 대사헌으로 있을 때 태종의 딸 경정공주(慶貞公主)의 남편인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을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잡아다 고문하자이 일로 태종의 노여움을 사
죽을 뻔 하였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 남았다. 고불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1411년 판충주목사에 임명되자 예조에서는 음률에 정통한 고불을 선왕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무르며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하고, 또한 이듬해 관찰사로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은 고불로 하여금 악공을
가르치도록 아뢰어 결국은 부임하지 못하였다.

   효심이 지극하였던 고불은, 모친이 돌아가자 7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고, 장사를 지낸 후도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조석으로 3년 간이나 예를 올렸다. 이 때 돼지가 묘 앞에 심은 잣나무를 비벼대어 죽이자,
잘못을 뉘우치며 돼지를 다음 날 호랑이 밥으로 주니, 사람들은 효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이처럼 효성이 지극한 고불이라, 그 후 여러 번 아버지를 모시고자 벼슬을 물러나려 하였으나 그 때마다
허락되지 않았고, 호조 판서로 있을 때에 늙은 아버지가 병으로 눕자 또 다시 사직을 원하니 임금도 할 수 없이
그를 충청도 관찰사로 삼아 아버지를 곁에서 봉양하게 하였다. 1420년에 이조 판서에 오르고,
1427년 우의정에 올랐을 때, 「태종실록」을 편찬 감수하는 직책을 맡은 적이 있었다.
실록이 완성되니, 세종이 보자고 하였다. 그러자 고불은,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세종은 그 말을 따랐다.
나이가 많아 벼슬을 물러났으나 나라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임금은 반드시 고불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한다.
어느 날 김해에 있는 연자루(燕子樓)에 올라 시 한수를 읊기를,

가락이 남긴 터는 몇 해나 되었는가 (駕洛遺墟幾見春)
수로왕의 문물도 티끌로 돌아갔네 (首王文物亦隨塵)
가련해라 저 제비는 마치 옛이 그리운 듯 (可憐燕子如懷古)
연자루 곁에 와서 주인을 부르네 (來傍高樓喚主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