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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엔 끝이없다.^^*/아는것이 힘

퇴계와 배순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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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배순의 만남


배순은 유교 이념을 실천한 위인이었다.

부모를 정성껏 부양 했으며 순흥읍지에는 효자라 기록되어있다.

그는 효성도 지극하여 지역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마음도 순수 했으며 퇴계의 교육을 받은 제자로서 더욱더 올바른 행동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배순은 효행뿐만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그릇됨이 없었으며 장안에 널리 인정받는 인물이었다.(곽진, 이준)

퇴계가 백운원에서 강학을 할 때에

배순이 살았던 곳은 소수서원에 가까운 중촌 배점리 였으며 직업은 야공(冶工)이었다.

그는 신분이 미천함에도 학문을 좋아하였고 퇴계가 백운원에서 강학할 때 자주 뜰아래에 와서 돌아갈 줄 모르고 즐겨 청강(聽講)을 하기에 해득(解得)함을 시험해 보았더니 능히 이해하므로 기특하게 여긴 퇴계가 함께 가르쳤다.

  퇴계는 배순의 신분을 차별하지 않고 함께 가르쳤고, 그를 가르친 흔적이 남아 있음으로 보아 평민을 사랑했고 서민의 인권도 존중 했으며 평등교육을 실천한 위대한 교육자로서 평가를 받게 되었다.

  퇴계는 배순을 채 한해도 못 가르쳤으며, 배순은 퇴계선생이 떠난 후 그의 재간을 다 쏟아 철상을 제조해 모시고 공부를 계속했다.

  배순은 퇴계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을 위해 3년 복을 입었으며, 퇴계의 철상을 만들어 선생의 은혜를 잊지 않고 매일같이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선조 임금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는 슬퍼하며 임금을 위해 3년 상을 모셨으며 3년 동안 소식(小食)하며 벌레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퇴계에게 배운 제자의 도리로서 유교이념을 실천했던 것이다.

선조임금의 삼년상과 연관된 배순의 이야기도 지금까지 지역사회에 구전되고 있다.


나라님인 선조 대왕이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듣고 3년 동안 나막신을 신고 매일식전에 이곳(배점)에서 30리 정도 되는 소백산 국망봉에 올라가서 서울을 보고 울었다고 해, 곡을 하고 우니까 서울 궁궐까지 들렸다는 말이지. 그래서 충신이기 때문에, 하늘이 감동을 해서 소백산 꼭대기에서 우는게 대궐까지 들렸다는 말이야. 그래서 충신으로 이름이 난 것이고  충신각이 자리하고 있지...”라고 동네 주민은 말한다


이러한 배순의 선행은 지역민 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배순은 퇴계의 상을 만들어 살아있을 때처럼 모셨고 선조 사후에는 나막신을 신고 3년동안 국망봉을 올랐고 국망봉에서 우는 소리가 서울(대궐)까지 들렸다는 것으로 그의 행적이 주민들에게 전해진다.

또 배점의 한 주민은 국망봉에 배순의 나막신 자국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지역주민에게 배순의 이야기는 전설이자 신화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배순이 올라 망곡을 했던 봉우리에 궁궐을 향해 울던 봉오리란 의미의 국망봉(國望峯)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국망봉은 퇴계가 자주 올랐던 봉오리로써 배순 이전에 이름이 지어진 봉오리이다.  그럼에도 국망봉은 지역민에 의해 배순과 관련하여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그는 두 분의 상(喪)에서 극진하게 예를 갖추었으며 그만큼 슬퍼함이 남달랐다. 배순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정도로 스승에 대한 제자의 도리, 임금에 대한 백성의 도리를 다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퇴계 이황은 평등사상을 실현한 선비로 잘 알려진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손님이 오면 끼니를 곁들인 주안상을 내어와서 정성을 다하여 대접 하였고 비록 나이가 어린 사람이 방문하였을 때라도 꼭 섬돌 아래까지 내려가서 맞이하고 전송 하였다.

또한 종 딸의 목숨과 자신의 증손자의 목숨을 같이 여겨, 결국에는 증손자 창양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증손자와 종의 딸이 인격을 저울에 달아 기울지 않게 중히 여겼고 부모가 자식 키우는 사랑과 천륜이 사람의 귀천에 차별 없음을 실천으로 보였다.

퇴계는 1548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 했다가 그해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해왔다.

신재선생은 그 사이 홍문관 부 재학, 승정원 동부, 좌부승지, 좌. 우승지, 도승지, 호조참판을 거쳐 가을에 황해도 관찰사(1548년 8월)로 가 있을 때다.

신재선생이 백운동에 서원을 창건하고 떠난 지 4년 뒤에 퇴계가 풍기군수로 온 것이다.

신재선생 역사적인 큰 위업을 이임 후 다음군수(풍기읍지 관안에는 유경장(柳敬長) 군수로 적혀있다. 관찰사의 무관심 때문에 퇴계선생 이니었다면 대 교육 기관인 서원의 출발은 시작과 함께 흐지부지 끝날 뻔 했다.

  영성군 신광한(대제학) 백운동 소수서원기에는 그러한 내력을 자상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그 일에 관계되는 군수가 朝政(조정)에 청원치를 아니하고 관찰사가 또 듣고 보고 하지 아니하면, 아무리 어진 임금이 좋은 뜻을 많이 가졌다 하더라도 훌륭한 사업을 빛나게 할 수가 없고, 나라에서 그 일을 도울 수도 없는 터, 그래서 훌륭한 지방관일지라도 그 이름이 국사에 오르지 못한다.  또한 그 사업인들 오래 지속하고 경영될 수 있으랴.  뒤에 부임한 이황군수는 그 일을 실패할까 안타까이 여겨 서원 창설에 관한 전말과 기록을 모두 갖추어 편지를 써서 심통원(沈通源 )감사에게 알리면서 송(宋)나라때 주자의 백록동 설원고사 (白鹿洞 設院故事)를 자세히 밝혔다.  국왕이 들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 하였으며 , 서원의 이름을 지어 편액 (扁額)과 함께 서적도 하사하시여서 학문을 숭상하고 교육에 힘쓰고자 하는 임금의 뜻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게 하였다.  관찰사가 그 취지를 써서 아뢰었으므로 왕이 듣고 대신에게 하명하여 그리하도록 허락하였다.』


  이로써 신재선생의 백운동 설학 교육사업은  퇴계선생이 부임해 옴으로써 관찰사도 이해하게 되었고 조정에도 일려져 사학교육기관으로 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천명이었으며 절묘한 인연이었다.  퇴계선생으로 하여금 그 뒤로부터 평생사업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대한 계기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