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배움엔 끝이없다.^^*/아는것이 힘

배순의 생애와 동신으로 신격화된 그의 사후

 

배순의 생애와 동신으로 신격화된 그의 사후

 

배순에 대한 기록은 창석 이준(1560~1635)과 단곡 곽진(1568~1633)의 개인문집과 퇴계의 제자를 기록해 놓은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1914 순흥 향토지인 순흥읍지등 여러 문헌에 있다.  또한 정려비문과  배순의 묘비, 드리고 증손자인 배돌성의 묘비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배순의 사망 연대는 기록에 따라 74세 78세 80세로 적혀지고 있다.

배순이 선조임금(1552~1608)의 삼년상을 지냈다는 것으로 보아 그는 탈상이 된 1610년까지는 생존 하였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배순의 행적과 사망한 연령을 살펴보면 그의 행적이 남아있는 시기는 1548년~1610년이 된다. 그는 이 기간을 포함해 74년~80년간을 살았던 인물이다.

단곡, 창석 선생문집 도산급문제현록 등에서 배순의 신분은 양민 순흥의 백성이라 하고 직종은 수철공(水鐵工:무쇠장이)이라하며 그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예안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배순이 결코 천한 신분이 아니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양인이었던 배순이 남모를 개인사정으로 인하여 배점으로 주거지를 옮겨 천직인 대장장이를 했다는 뜻도 될 수 있겠다. 배순의 정려비와 그의 증손자 배돌성의 묘비문에는 배순이 흥해배씨라고 적혀 있으나 배순은 흥해배씨의 족보 어느 곳에도 없다.

배순의 행적은 유림들에게 높이 평가받았고 이러한 명성은 이웃지방인 안동으로도 전해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배순이 족보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당시 흥해배씨가 안동지방에서 명문 사족이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배순이 천한 대장장이였기 때문이거나 다른 한편으로 가게가 불분명한 서자였을 가능성 때문인 듯하다.

배순의 행적은 지역주민 사이에서도 폭 넓게 구전 되었다.  이것은 배순이 순흥지역의 위인으로서 지역민의 커다란 자부심이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배순이 지역사회에서 귀감이 되는 인물로 알려지면서 1613년 풍기군수 이준이 정려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1615년 5월에 정려가 내려 졌다고 정려비문에 적혀있다.

정려각은 대체로 마을의 입구나 중간에 건립되어 지역민에게 유교이념을 일깨우는 상징물이다. 배순의 정려각도 그가 살았던 평장동 가운데 세워졌다.  그 당시 평장동은 순흥현의 영향권에 속하지만 소백산 밑에 위치한 각성마을로서 신분이 낮고 가난하여 지역사회에서 상당히 주변적인 마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평장동은 효자이며 충신이었던 배순이 대장간을 운영했던 마을이라 하여 배점이라 불리게 되었다.

곽진(1608년 ~ 1615년 소수서원 원장역임)


  배순의  임종시에도 그는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었다고 믿고 있는 이야기는 구전되어 내려온다. 

  배 충신이 임종시 부인에게 “어디 좀 다녀와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뒤돌아 보지마라” 라는 말을 했는데 부인은 자식을 데리고 마을로 가다가 혹시나 하고 뒤를 돌아보니 집에 불이타고 있더라는 겁니다. 부인이 자신의 집을 자세히 보니까 배충신이 화염에 쌓여 하늘로 등천하려고 말에 올라타려고 하다가 부인이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등천을 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용으로 등천을 못하고 소에 빠졌다. 그래서 그곳을 용소라고 부른다고 한다.

용소는 죽계구곡의 하나로서 순흥읍에서 기우제를 지냈던 곳이다.  이처럼 용소는 용이 살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용은 곧 배순을 의미한다.

배순의 정려비는 정려가 내려진 34년 뒤 1649년 그의 손자(배종)와 외손에 의해 건립된다.

정려비가 세워진 46년 후 1695년 그의 외 7대손 임만유가 정려비를 마을에 다시 세움으로써 배순은 마을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된 셈이다.

  배점 마을은 순흥읍을 생활권으로 삼았지만 읍의 변방에 위치한 산간마을이었다. 各姓(각성)으로 이루어진 가난하고 힘없이 소외된 마을이었던 곳에 충효정신을 실천한 마을이라는 정체성을 더 확고히 하기위해 배순을 신격화하기에 이르렀다.

  현 배점에는 배순의 후손은 없지만 주민은 배순의 명의로 된 논 2마지기를 동답(洞畓)으로 경작한다.  대장장이 배순은 천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행적은 세인의 칭송을 받았기에 그의 유산을 동민들이 경작하여 그를 제사지내왔다.  주민들의 이러한 행위는 비록 낮은 신분일지라도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배순 행적의 위대성은 세월이 흐르면서도 계속 전해졌으며 설화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전해오는 설화는 비문을 쓴 사람이 소수서원 원장을 10년 역임한 단산 질막이라는 동네에 살던  단곡선생으로 배순정려비문을 썼는데 충신이면 “충신배순지려”라고 쓰지 않고 충신백성 배순지려라고 써서 곽선생 후예가 없다는 말이다.

충신과 백성의 의미차이로 주민들은 아쉬움을 표하면서 배순의 영험성을 말해준다.


배순의 영험성은 20세기 초반부터 현몽을 하여 마을사람들에게 다시 각인 되는데, 꿈에 나타난 배순은 죽어서도 효를 다 하는 훌륭한 인물이었고 마을 주민들을 생각하는 위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배순을 확실한 동신으로 믿게 하였으며 마을사회의 신이한 존재로 재확인 되었다. 꿈에서 나타난 배순의 이야기는 배충신의 묘를 벌초 했는데 그해 현몽하기를 “내 묘를 풀 베지 마라”고 했다  그러나 꿈인가 싶어서 다음해에 또 벌초를 하니까 “내 묘를 풀 베지 마라 내 조상묘가 다 묵고 있는데 내 묘만 비면 뭐하노” 그래서 다음부턴 벌초를 않고 묵고 있다.

  또 한 예는 일제시대를 거쳐 6.25 전쟁 시 제사를 계속 지내 오는데 비행기의 폭격이 심해서 밤에 불을 켜지 못해 새벽에 제사를 지내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져 저녁에 음식을 장만 하려해도 할 수 없어 자고 있는데 배 충신이 나타나서 안방문을 열고 “안즉 멀었니껴?” 하더라는 거였다. “어야꼬 아직 불도 안 살렸는데요 어야꼬여 늦어가지고”하니 “늦어도 괜찮니더 비행기가 댕기니께로 그럼 이제 천천히 하이소” 하더라는 거였다. 그 꿈을 잊어버리지도 않고 지금껏 기억 한다는 주민의 말씀이다. 그래서 온갖 준비 해 놓고 기다려도 재관이 오지 않아서 제관집에 쫒아가니 논에 나갔다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그 제관이 “배충신이 독촉을 하시던데요” 하면서 옷을 다 입고 와 있더라는 것이다.

이렇듯 현몽을 통하여 배순은 조상을 위해 죽어서도 효를 다 하는 위대한 인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배순은 마을 사람들을 보살펴 준다는 믿음을 심어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배순을 숭배하는 동제는 원 배점 마을뿐이 아니라 상평 마을과 하평마을까지 받들어 지고 그 후엔 인근 뒷실 마을 까지도 배순의 제사에 참여해 그 범위는 확대 되었다.

현 배점마을에선 동제를 일년에 두 번 지냈는데 1970년대 중반에 도로 옆으로 옮겼던 정려각을 1992년 학교 옆으로 옮기면서 제사를 정원 보름에 한번만 지내게 되었다.

정려각은 3차에 걸쳐서 이전 되었는데, 1차 이전은 1944년 배점 초등학교 건립을 위해 원래의 자리에서 학교 운동장 서편으로 옮겨졌다. 

그 후 2차 이전은 1970년대 중반에 학교 운동장에 있던 정려각이 운동장 사용에 지장이 있다하여 마을입구 길옆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3차 이전은 향토사학자 이재홍씨와 포항공대 권오봉교수에 의해 지금의 위치인 삼괴정 옆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충신인데 길 맡에다가 옮겨 놓았다 해서 선비들이 말이 많았고, 동네엔 재앙이 연이어 생기고 자동차 사고(事故) 소 같은 짐도 재앙이 나니, 충신각을 내려서 그런갑다 하고 올렸지”

  "배 충신각을 길 아래로 옮기고 건너동네에 사람이 일년에 5~6명이 죽었어 그래놨더니만 소문이 충신각을 잘못 옮겨서 죽었다는 말이 있어서 학교 옆으로 옮겼지“

  “삼괴정으로 옮긴 이유는 우리네 생각에는 이 양반이 남이 안 다니는데 있어야 되는데, 천한 길 맡에 있으니깐”

이렇듯 여러 사람들의 정려각 2차 이전에 부정적으로 평가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정려각 3차 이전이 요구되고 향토사학자 이재홍씨와 권오봉 교수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실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