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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란 무엇이고 영주선비의 의미는?

대장장이 배순이 신(神)이 된 연유는.... (2)

선비란 무엇이고 영주선비의 의미는?


  그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과 가치질서를 제시하는 지성인이요,

앞장서서 그 시대이념의 가치질서를 실천하는 수호자라 할 수 있으며,

그 가치의 핵심은 도덕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벼슬에 나가 행할 도(道), 즉 정치이념이 확실해야 되고,

벼슬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높은 지조와 맑고 고결한 인품은 스스로 모범이 되어

후학에게 비추어 먼 훗날에 이르기까지 교훈을 주는 것이다.

우리나라 선비는 고려 초 ․ 중엽에 골격이 잡히기 시작하여

영주선비 안향에 의해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유학이 새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퇴계 이황은 “회헌 안향선생이 학교를 일으켜 유교를 숭상하여 (려말) 麗末에 가서

도덕과 절의를 갖춘 포은 정몽주(鄭夢周)같은 인물을 배출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그의 힘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면서

조선시대 선비를 형성하는데 안향선생의 기여도를 높이 평가했다.

 

이렇게 볼 때 영주선비의 형성은 우리나라 선비의 형성시기와 일맥상통 한다고 할 수 있다.

영주선비들은 려말 ․ 선초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켰으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으며, 그 절의를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이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 1495~1554)에 의해  순흥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이 창건되고

퇴계 이황의 노력으로 명종임금『소수서원』사액을 받으면서

영주선비들이 체계적으로 배출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로부터 소수서원은 이후 영주선비를 길러내는 산실이 되었다.

영주선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수 없이 많이 배출되어

선비의 고장으로 그 이름을 전국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영주는 소수서원이 건립된 후 이산서원 등 20여 곳의 서원이 건립되고

3곳의 향교(순흥향교, 영주향교, 풍기향교)를 비롯해

수십 곳의 서당이 건립되어 선비의 본 고장으로 자리 잡아왔다.

  이러한 소수서원을 중심으로 한 향토 출신의 선비들이 출처거취를 통해 물러나

이곳 영주에 자리를 잡은 많은 선비들이 우리지역이 선비의 고장임을 확고하게 해 주었다.

  그러한 선비의 정신은 죽~~ 이어져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되고,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10년 경술국치로 조선왕조가 멸망하는데 이르기까지, 

의병을 일으켜 침략세력에 대해 강인하게 저항한 도학선비들의 투쟁의 중심에는

영남만인소라는 대규모 운동이 있었다.

 영주에서의 영남만인소는 안동보다 앞선 1880년 10월 29일 문수면 황조동에서 첫 모임 가지면서

시작되어 11월 1일 영주향교 통문을 발송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1월 26일 안동향교에서 도내유생 800여명이 참석하여 도회를 개최하여

위기상황이 닥칠때 한말도학의 선비들은 어느 때보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

강인한 의리정신을 발휘하고 비장한 저항 태도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1913년 12월 경북 영주시 풍기에서 채기중등이 중심이 되어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 조직의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했는데 이것이 대한광복단이다.

 

예부터 선비가 가장 번성했던 도는 경상도였다.

그 중에서도 영주  인근 지역에서는 수많은 선비들이 배출 되었다.

영주의 선비는 안향이 성리학을 들여옴으로써 형성되는데

성리학의 도입은 우리나라의 선비를 확립시키는 계기라 할 수 있으며

퇴계 이황의 후학계승이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