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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스크랩] 서릿골 족제비

영주 서릿골 족제비 전설

연화산 북쪽 기슭 장수면과 경계에 자리해 있는 서릿골은 소고공 박승임(1517~1586) 조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보 호는 소고로 경상북도 영주출신 형(珩)의 아들인데 이 마을은 박승임의 7세손 박정구(1719~1798) 선비가 터전을 열어 그 자손이 세거하는 동족마을이다.

 

대게 족제비란 쥐나 뱀을 잡아먹어 사람에게 유익한 동물이지만

어쩌다가 병아리를 훔쳐 가는 있기는 해도 사람들이 탐내는 가죽이나 꼬리털을 ㅡ가졌다ㅑ는 것이 죄 아닌 죄여서 족제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눈에 띌새라 조심조심 숨어 살아야만 하는 짐승이다.

그러나 여기 서릿골의 족제비만은 그렇지 않아서 대낮에 떼를지어 골목에 활개를 치고 다녀도 누구하나 잡으려 하지 않는다. 옛날 이곳에서 어느 한 족제비에 얽힌 희한한 한토막 사연이 계기가 되어 서릿골 마을은 수백년동안 족제비의 천국을 이루고 있음이다. 조선종조시대 진사 박문엽(朴文曄 1674~1719 반남박씨 16세손)의 둘째아들 정구선비는 한정마을에서 서릿골에 살면서 그 아버지께 문안을 드리기 위해 매일같이 한정마을 큰댁 박정열(朴鼎熱 1704~1775)댁에를 오르내렸다.

아직 겨울이 채 물러가지 않은 이른봄 어느날이었다. 정구선비가 그날도 문안길로 동구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갑자기 커다란 족제비가 달려들어 선비의 도포자락을 물고는 기를쓰고 끌어 당기는 것이 아닌가. 선비는 무슨 곡절이 있음이리라 짐작되어 족제비가 이끄는데로 따라갔더니 과연 까닭이 있었다. 끌려가고보니 부근에 있는 넓은 웅덩이 둑이 있는데 물 가운데 새끼 족제비들이 빠져서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옳거니 선비는 곧 옷을 걷어 올리고 물속에 들어가 그들을 모두 건저내어 옷자락으로 물기를 말끔히 닦아주고 돌아섰다.

그런일이 있은 몇해가 지난 어느날 커다란 족제비 한 마리가 선비의 집 툇마루에 와서 죽어 있었다. 족제비털은 황모(黃毛)라하여 본래 황모무심필(黃毛無心筆)이라면 선비의 문방에서는 귀물로 여기는 것이다. 전날 정구선비에게 새끼를 구원받은 그 족제비가 생명이 다하게 되매 버려야 하게된 몸으로 선비의 은혜를 갚으려 함이었던 것이다. 정구선비는 그털로 붓을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아니하여 과거가 열리매 1798년(정조 22년) 그 손자 시원(時源)이 그 붓을 가지고 응시하여 당당히 장원으로 급제되는 영광을 차지한 바 되었으니 실로 희한한 인연이다.

이렇게 맺어진 서릿골 반남박씨와 족제비와의 사이는 지금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서릿골 수십가구는 거의 그 선비의 자손이어서 오늘도 한결같이 족제비를 보호한다니 진실로 훈훈함이 감도는 이야기가 아닐수 없다.

 

1.1.1.1.1.1.1. 참고로 박시원은 1764(영조40) 1842(헌종8) 조선후기의 문신 반남박씨의 19대손이다. 자는 치실(穉實)이고 호는 일포(逸圃)로 사표(師豹)의 아ㅑ들이다.

1.1.1.1.1.1.2. 1798년

첨부파일 서릿골.hwp

 

출처 : 경북문화관광해설사
글쓴이 : 권화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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