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관광/해설관련

[스크랩] 동국 여지승람의 영주

영주시역사 문헌

<동국여지승람 권25> 영천군 榮川郡

동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에 이르기까지 27리, 예안현(禮安縣) 경계에 이르기까지 51리, 남으로 안동부 경계에 이르기까지 41리, 서로 풍기군(豊基郡) 경계에 이르기까지 12리, 북으로 풍기군 경계에 이르기까지 14리, 서울에서의 거리는 4백 3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내이군(奈已郡)이다 : 내(奈)는 날(捺)로 된 것도 있다. 신라(新羅) 파사왕(婆娑王)이 취했고, 경덕왕(景德王)이 내령군(奈靈郡)이라 고쳤다. 고려(高麗) 성종(成宗)이 강주단련사(剛州團練使)라 고쳤고, 현종(顯宗)은 길주(吉州)에 귀속시켰더니, 인종(仁宗)이 순안현령(順安縣令)이라 고치고, 고종(高宗)이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인준(金仁俊)이 살고 있는 시골이라 하여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승격시켰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세조(世祖) 3년에 순흥(順興)을 없애버리고, 마아령(馬兒嶺) 아래 물 동편 땅인 부석(浮石)ㆍ무짐이[水息]ㆍ관천(串川)ㆍ파문단(破文丹) 4리(里)를 끊어서 이 군에다 귀속시켰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기 한 사람씩이다.
군명 내이(奈已)ㆍ내령(奈靈)ㆍ강주(剛州)ㆍ순안(順安)ㆍ영주(榮州)ㆍ귀성(龜城)
성씨 분군 민(閔)ㆍ우(禹)ㆍ애(艾)ㆍ팽(彭)ㆍ동(董)ㆍ고(高) : 내성(來姓)이다. 연(延) : 촌성(村姓)이다. 정(鄭) : 봉화(奉化) 김(金) : 영월(寧越) 전(全) : 정선(旌善)에서 왔다.
풍속 풍속은 검소하고 진솔함을 숭상한다 : 관풍안(觀風案). 인물은 번성하고 많았다 : 문헌(文獻)의 제민루기(濟民樓記).
산천 철탄산(鐵呑山) : 군의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귀산(龜山) : 군의 서남 1리에 있으며, 군의 옛 이름 귀성(龜城)이 이에 말미암았다. 학가산(鶴駕山) : 군 남쪽 40리에 있다. 봉황산(鳳凰山) : 군의 북쪽 20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순흥에 속하였다가 이제 이 군에 귀속되었다. 마아령(馬兒嶺) : 군 북쪽 36리에 있는데, 길이 심히 험하였으며, 충청도 영춘현(永春縣)으로 가는 길이다. 관적령(串赤嶺) : 군 북쪽 33리에 있다. 방하수(防河藪) : 군 서쪽 2리에 있다. 덕산수(德山藪) : 군 남쪽 3리에 있다. ○ 이 고을은 본래 수재를 근심하였는데, 하륜(河崙)이 군수가 되었을 때, 흙을 쌓고 나무를 심어 이 두 수(藪)를 만들었다. 그 뒤에 백성들이 그 이익을 힘입었다. 임천(臨川) : 군 서쪽 3리에 있다. 풍기군의 남북쪽 냇물과 옛 순흥(順興) 동쪽 냇물의 하류로, 귀산(龜山) 밑을 지나 남으로 흘러서 사천(沙川)에 이르러 합하여 예천군(禮泉郡)의 사천(沙川)이 되었다. 사천(沙川) : 군의 동쪽 15리에 있으며, 봉화현(奉化縣) 물야계(勿也溪) 하류이다. 신증 봉산(蜂山) : 군 동쪽 15리에있다. 연화산(蓮花山) : 군 남쪽 15리에 있으며, 백병산(白屛山) : 군 북쪽 50리에 있다. 풍락산(豊樂山) : 군 동쪽 56리에 있다. 담보산(?甫山) : 군 북쪽 5리에 있다. 백령(白嶺) : 군 남쪽 15리에 있다. 병령(竝嶺) : 군 동쪽 20리에 있다. 장암천(藏巖川) : 군의 남쪽 12리에 있다. 초수정(椒水井) : 군 북쪽 42리에 있다.
토산 종이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송이[松?]ㆍ벌꿀ㆍ칠(漆)ㆍ은어[銀口魚]ㆍ지황(地黃)ㆍ복령(茯?)ㆍ왕골[莞草]ㆍ석심(石?).
성곽 귀산성(龜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2백 81척이요, 높이가 9척이며, 그 안에는 우물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성내산(城內山)봉수 : 군 북쪽 14리에 있다. 동으로는 안동부(安東府) 내성현(奈城縣) 당북산(堂北山)봉수에 응하고, 서로는 풍기군(?基郡) 망전산(望前山)봉수에 응한다.
누정 자민루(字民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선덕(宣德) 정미년에 군수 권상(權詳)이 세웠다. 제민루(濟民樓) : 귀산(龜山) 남쪽에 있다. 선덕 계축년에 군수 반저(潘渚)가 세웠으니, 곧 의학루(醫學樓)이다. 교수관(敎授官) 문헌(文獻)이 기(記)를 지었다. 소루(小樓) : 객사 남쪽에 있다. 천순(天順) 년간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세웠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기(記)에, "죽령(竹嶺) 남쪽에 자리잡은 고을 중에 영천이 제이(第二)가 된다. 그 산천은 밝고 빼어났으며, 그 고을 터는 상쾌하고, 그 백성의 풍속은 검소하고 순박하였다. 이 고을에 원으로[製錦] 오는 이가 가끔 군자(君子)가 많았으나 그 중 남의 이목에 표표히 뛰어난 이는 하호정(河浩亭)ㆍ정습인(鄭習仁)ㆍ최원부(崔元傅) 세 사람뿐이었는데, 지금의 수령 오천(烏川) 정 선생(鄭先生)도 역시 그들과 같이 칠 수 있는 이었다. 그는 어버이 봉양을 이유로 대부(臺府)를 사직하고 이 고을을 맡았다. 무릇 그의 시설한 것은 마치 현보(縣譜)를 가진 듯하거니와, 공경으로써 윗사람을 받들고 따사로움으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정직함으로써 간사한 자를 다스리었다. 넉넉한 자질로 다스리기 쉬운 백성을 교화하니, 비유하건대, 소백정[?丁]이 날선 칼날로 소뼈 사이를 쳐서 소를 잘 잡듯 하였으니, 어찌 어긋날 걱정이 있겠는가. 1년이 되지 않아 경치가 잘 되고 백성이 화락하였다. 한가한 날 자민루(字民樓)에 올라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이 고을은 사신ㆍ빈객이 죽령을 넘어 왕래하는 요충이다. 사신이 있으면 반드시 빈좌(賓佐)가 있다. 매양 뜨거운 여름을 당하면 집이 찌는 듯 답답하여, 마음을 맑은 바람에 씻어 번민함을 버리려고 생각할 적에, 사신은 이 루[樓]가 있지만 빈좌들은 어디에 거처할 것인가. 이것이 어찌 하나의 결함이 아니겠는가.' 하고 드디어 사방을 둘러보다가 동남쪽 구석에서 쓸모없는 집 한 채를 얻었으므로 이에 이를 개척하여 새롭게 하되, 그 기둥을 약간 높이고 곁에는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아래에는 땅을 파서 못을 만들어 두어 말[斗]의 고기를 넣고, 못 안에 있는 섬에는 참대[苦竹] 여덟 아홉 그루를 심고 잡(雜)꽃을 그 사이에 간간히 심었더니, 난초는 그 기슭을 덮고 부용은 그 물결을 가렸다. 벽을 바를 적에 내가 가서 올라보니, 소나무는 죽죽 벌였고 울타리는 한가했으며, 푸른 이랑 누런 두렁은 수를 놓은 듯 엇갈리어 준조(尊俎)에 빛났다. 뽕나무밭을 매는 자와 농사짓는 이들이 그늘에서 쉬지는 못하지만 소장(訴狀)을 가진 이는 장애될 근심 없어, 산업을 권면하고 농사를 처리하는 정치에 도움됨이 적지 않았다. 이에 잔을 들어 주인에게 축하하며 말하기를, '세상의 수령(守令) 가운데, 게으른 이는 남을 의지할 뿐 스스로 진작하지 못하니, 비록 관청이 퇴락해도 받치고 붙들어 그냥 세월만 보낼 뿐 손 하나 감히 놀리지 못하오. 그리고 강한 이는 그 지혜를 뽐내어 백성의 힘을 가벼이 동원하매 번거롭게 명령을 내리면서 영선(營繕)이 그치지 않으니, 많은 백성들이 매맞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하오. 선생(先生)이 한 것은 이들과 같지 않으니, 여력(餘力)에서 나온 것이며, 옛것을 새로이 한 것이며, 어두운 것을 밝게 한 것으로 터럭만치도 백성을 수고시키지 않았고 재물을 소비하지 않았소. 그래서 비록 군청에 있으면서도 이 역사가 있은 줄 몰랐고, 지나가는 길손이 비와 이슬을 피할 수 있으며, 쉴 자리를 염려하지 않게 한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어진 사람의 행동이라 이르는 것이요. 아, 선생의 뒤를 이어 일을 하는 이가 선생을 모범으로 삼는다면 현명한 수령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오.' 하였다." 했다. ○ 옛사람의 시(詩)에, "반마(班馬)로 오르니 억지로 스스로 넓히며, 잔춘(殘春)의 마음은 바로 근심의 실마릴세. 울 밑에서 잔을 드니 붉은꽃 싫도록 보고, 처마 아래에 발을 거니 푸른 산 받아들이네. 기다란 휘파람은 능히 원별(遠別)을 위로하고, 흩어진 놀이는 잠시 환관(環觀)을 다하네. 오천(烏川)의 풍경은 모두 시의 재료, 읊으면서 한가로움을 얻게 해주네." 하였다. 신증 쌍청당(雙淸堂) : 객관(客館)의 동쪽에 있으니, 군수 김세훈(金世勳)이 지었으며, 좌우에 쌍으로 연못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의 동쪽 1리에 있으니 하륜(河崙)이 지주(知州)로 있을 때 세웠다.
역원 창보역(昌保驛) : 군 서쪽 9리에 있다. 평은역(平恩驛) : 군 동쪽 26리에 있다. 효대원(孝大院) : 군 동쪽 7리에 있다. 문수원(文殊院) : 군 남쪽 11리에 있다. 금림원(金林院) : 군 동쪽 36리에 있다. 승리원(乘利院) : 군 서쪽 10리에 있다. 가이원(加耳院) : 군 북쪽 20리에 있다. 장금원(長金院) : 군 서쪽 23리에 있다. 덕산원(德山院) : 군 남쪽 3리에 있다. 철겸원(鐵鉗院) : 군 서쪽 3리에 있다.
불우 행의사(行衣寺) : 군 서쪽 20리에 있다. 흑석사(黑石寺) : 군 남쪽 15리에 있다. 응석사(凝石寺)ㆍ정불사(淨佛寺)ㆍ부석사(浮石寺) : 모두 봉황산(鳳凰山)에 있다. ○ 궁예(弓裔)가 일찍이 이 절에 이르러 벽화(壁?)에 그려진 신라왕(新羅王)의 상(像)을 보고 칼을 뽑아 쳤는데, 고려(高麗) 때에 와서도 그 흔적이 그냥 있었다. 이것은 생시에 버림을 당했던 것을 원망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 《보한재집(補閑齋集)》에 "고려(高麗) 사천감(司天監) 이인보(李寅甫)는 경주도(慶州道) 제고사(祭告使)로서 산천(山川)을 돌며 제사지냈는데, 일이 끝나 장차 돌아가려던 저녁에 부석사(浮石寺)에 닿았다. 객우(客宇)가 조용하고 좌우에 사람이 없었는데, 홀연히 한 여인이 언뜻 마루 사이로 보이더니 좀 뒤에 춤추듯 마당을 돌아와서 절을 했다. 절을 마친 뒤에 섬돌을 올라 방에 들어와 앉았다. 사천감은 비록 괴이하게 생각했지만 자색(姿色)이 뛰어났으므로 차마 거절치 못했다. 여인이 말하기를, '제가 사는 곳은 여기서 멀지 않아요. 높으신 뜻을 혼자 사모해서 왔습니다.' 하고, 그 응대(應對)함이 총민하였다. 사흘 묵고 떠나서 우정(郵亭)에 숙박했는데, 여인이 하느적하느적 따라왔다. 사천감이 말하기를, '왜 또 왔소.' 하였더니, 여인이 말하기를, '뱃속에 당신의 애기가 있어요. 다시 하나를 더하고자 해서 온 것이어요.' 하였다. 새벽이 되자 작별을 고하고 흥주(興州)로 들어갔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여인이 또 왔다. 사천감은 후환이 될까 해서, 여인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상대하지 않았더니 여인은 발끈 골을 내면서 방문을 나가는데, 회오리 바람이 땅을 말아올려 집의 문짝 하나를 부서뜨리고 나뭇가지를 꺾어놓고는 갔다." 하였다.
신증 당(唐) 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 의봉(義鳳) 1년에,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이 스님 의상(義相)에게 하명하여 이 절을 창건하고 부석(浮石)이라 이름지었다. 동쪽에는 선묘정(善妙井)이, 서쪽에는 식사룡정(食沙龍井)이 있는데, 가물 때 기도드리면 감응이 있었다. ○ 박효수(朴孝修)의 세에, "새 울고 꽃 져서 꽃다운 나이 이우는데, 나그네 길 시간은 빨리도 가네. 어느 날 마셔보리, 용정(龍井) 물 차맛을, 마루에 가득한 솔과 달 인연을 함께 하고자."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북쪽 7리에 있다. 여단(?壇)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선곡현(善谷縣) :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고구려의 가곡현(賈谷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치고 내령군(奈靈郡)에 귀속시켰다." 하였다.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무신탑(無信塔) : 군(郡)에 무신(無信)이란 탑이 있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습인(鄭習仁)이 지군(知郡)으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이상하도다. 악목(惡木)에서는 쉬지 않고 도천(盜泉)은 마시지 않는다 하니, 이는 그 이름이 나쁘기 때문이다. 탑은 고을에서 쳐다볼 수 있게 우뚝 서 있는 것인데, 어찌 무신(無信)을 표방한단 말인가" 하고서, 쪼아 없애게 하고는 그 벽돌로 빈관(賓館)을 지었다. 신돈(辛旽)이 이를 듣고 노해서 계림옥(鷄林獄)에 구속하고 다시 전법(典法)으로 얽어 사지(死地)에 처치하려고 했다. 정신(廷臣)들이 가련히 여겨 이를 구원해 주었으나 서인(庶人)으로 폐했다. 시사기(市肆基) : 신라 임금이 이곳에 오랫동안 주필(駐?)하다가 돌아갔다. 시사(市肆)의 터는 지금 군 서쪽 2리에 있다. 날이군(捺已郡) :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이 군에 행행(行幸)했다. 고을 사람 파로(波路)에게 벽화(碧花)란 16세 된 딸이 있었는데, 예쁘고도 고왔다. 그 아비가 이를 잘 꾸며서 가마에 태우고 빛깔 고운 비단으로 휘장을 두르고서 임금께 바쳤다. 임금이 찬물(饌物)이라고 여기고 열어보니 미녀(美女)였다. 그 뒤로는 여러 번 그 집으로 미행(微行)했다. 중도에 고타군(古?郡)이 있는데, 하루는 한 노파의 집에 묵게 되었다. 묻기를, "나랏사람들은 임금을 어떻다고 하오." 하니 노파가 말하기를, "모두들 성인(聖人)이라고들 하지만, 저만은 이 말을 의심스럽게 여깁니다. 듣건대, 임금께서 날이(捺已)의 계집에게 가노라고 누차 미복(微服)으로 다닌다고 합니다. 무릇 용(龍)이 고기의 옷을 입고 있으면 어부에게 제어당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임금께서는 만승(萬乘)의 존엄으로써 스스로 신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를 성인(聖人)이라 한다면 성인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부끄러이 여기고, 남몰래 그 계집을 데려다 궁중에 숨겨 두었다. 벌지부곡(伐只部曲) : 군 동쪽 15리에 있다. 마구부곡(馬駒部曲) : 군 북쪽 60리에 있다. 용산부곡(龍山部曲) : 군 서쪽 20리에 있다. 임지도부곡(林只刀部曲) : 군 동쪽 15리에 있다. 성을량부곡(省乙良部曲) : 군 동쪽 15리에 있다. 오등부곡(烏等部曲) : 군 북쪽 30리에 있다. 유수부곡(楡水部曲) : 군 북쪽 30리에 있다. 답곡부곡(沓谷部曲) : 군 북쪽 30리에 있다. 이곡부곡(沓谷部曲)ㆍ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 : 정종소(鄭從韶)가 수령으로 있을 때, 군지(郡誌)를 지으면서, "이곡(泥谷)은 바로 지금의 며전리(?田里)이니 군 서쪽 25리에 있고, 내소리(奈小里)는 바로 지금의 사내리(沙奈里)이니 군 동쪽 1리에 있다." 하였다. 그러나 두 부곡(部曲)은 예와 이제의 명칭이 같지 않으니 어디서 고증하여 이런 말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신증 장군곡(藏軍谷) : 군 동쪽 8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고려 태조(太祖)가 나라를 통합할 때 오천(吾川) 사람들이 불복하므로 이곳에 병사를 숨겨두었다가 이를 격파했다." 한다.
명환 고려 정습인(鄭習仁) : 공민왕(恭愍王) 때, 전교령(典校令)으로 지주(知州)로 나갔다. 시무(視務)하려 할 제, 아전이 고사(故事)에 따라 소재도(消災圖)를 찾아가 향을 사를 것을 청하였다. 습인(習仁)이 말하기를, "인신(人臣)이 불륜(不倫)한 일을 하지 않거늘 재앙이 어떻게 생긴단 말인가. 무망(無妄)하기보다는 순수(順受)할 뿐이다." 하고서 아전에게 명하여 철거시켰다. 본조 하륜(河崙) : 지주(知州)였다.
인물 본조 김증(金曾) : 과거에 두 번 급제했다. 벼슬은 금산 군수(金山郡守)에 이르렀다. 김담(金淡) : 김증의 아우이다. 두 번 급제했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문절(文節)이다.
효자 고려 문재도(文載道) : 홍무(洪武) 임술년(壬戌年) 봄에 왜적(倭賊) 수천 명이 본군(本郡)에 침략해 와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재도(載道)는 그 아버지를 업고 산골에 들어가 숨었는데, 왜적이 찾아와 그 아버지를 쏘아 맞혔다. 재도가 살촉을 뽑고 칼을 휘둘러 왜적을 베었더니 왜적들이 굴복했으므로 부자가 목숨을 온전히 했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벼슬은 평해군사(平海郡事)에 이르렀다.
본조 김이음(金爾音) : 과거에 급제했고 벼슬은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일찍이 어버이를 위해 3년간 여묘(廬墓)했으므로, 태조(太祖) 때 정려하였다. 우제(禹濟) : 벼슬은 감정(監正)에 이르렀다. 효자(孝子)로써 정려하였다.
신증 안수철(安壽鐵) : 그 아버지가 광질(狂疾)에 걸렸으므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약에 섞어 먹였더니 병이 나았다.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려하었다.
제영 휴가초초과귀성(携家草草過龜城)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가족을 데리고 허둥지둥 귀성을 넘는데, 나그넷길이라 아무도 성명을 모르노라. 신세가 기구하여 살쩍머리 셋거늘, 내일 아침에는 또한 영마루를 넘어 갈까나." 하였다. 일수영회포고성(一水?廻抱古城) : 김효정(金孝貞)의 시에, "한 줄기 물은 휘돌아 옛 성을 안아 흐르나니, 산의 형세는 곧 바로 거북의 이름 얻었다." 하였다. 계분연미음변인(溪分燕尾吟邊咽) : 윤자영(尹子濚)의 시에, "시내는 제비꼬리처럼 갈려 읊음 속에 흐느끼고, 산은 까치 머리되어 그림 가운데 모여든다." 하였다.

[비고]

방면 산이(山伊) : 동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봉향(奉香) :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망궐(望闕) : 끝은 10리이다. 사흥(司興) : 남쪽으로 처음은 5리이고, 끝은 10리이다. 두전(豆田)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권선(權先) : 위와 같다. 호문(好文) :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신혈(辰穴) : 남쪽으로 처음은 25리이고, 끝은 40리이다. 적포(赤布)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어화(於火) : 동남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천상(川上) : 동남쪽으로 처음은 27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말산(末山)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임지(林只)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60리인데, 봉화(奉化) 남쪽 경계와 안동 재산면(才山面) 서쪽 경계를 넘어 있다. 북면(北面) : 처음은 30리이고, 끝은 50리인데, 소천촌(韶川村)은 순흥(順興) 이부석면(二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으며, 답곡촌(沓谷村)은 동부(同府) 일부석면(一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고, 교각촌(校各村)은 동부 동원면(東元面)의 경계를 넘어 있다. 우측 두 촌의 북쪽은 영춘(永春)과 접해 있다. 오록(梧鹿) : 동북쪽으로 50리이며, 순흥(順興) 삼부석면(三浮石面)의 경계를 넘어 있고, 북쪽은 영춘과 접해 있다. ○ 벌지부곡(伐只部曲)은 동쪽으로 15리이며, 용산부곡(龍山部曲)은 서쪽으로 20리이고, 마륜부곡(馬輪部曲)은 북쪽으로 60리이다. 임지력부곡(林只力部曲)은 즉 임지면이며, 성을량부곡(省乙良部曲)은 동쪽으로 15리이다. 오등부곡(烏等部曲)ㆍ유수부곡(楡水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이다. 답곡부곡(沓谷部曲)은 북쪽으로 30리인데, 즉 답곡이며 이곡부곡(泥谷部曲)은 지금의 미전리(彌田里)이고 서쪽으로 25리이다. 내소리부곡(奈小里部曲)은 지금의 사내리(沙奈里)이며, 동쪽으로 1리이다.
봉수 창팔래산(昌八來山) : 동쪽으로 30리이다.
방면 읍창(邑倉)ㆍ동창(東倉) : 동쪽으로 30리이다. 북창(北倉) : 오록면(梧鹿面)에 있다.
토산 닥나무[楮].
누정 영훈정(迎薰亭) : 남쪽으로 3리이다.
사원 이산서원(伊山書院) : 선조(宣祖) 계유년에 건립하고 갑술년에 사액하였다. 이황(李滉) : 문묘(文廟) 조에 있다.

출처 : 경북문화관광해설사
글쓴이 : 권화자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