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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스크랩] 삼루암기 구봉정사기

출처는 김약련의 두암집입니다.
사실 김약련은 저의 집안 할아버지입니다. 직계 선조는 아니지만 현조라고 할 수 있는 분이라서 집안 어른들께서 자주 언급하십니다. 공개된 자리에서 일개 집안 어른의 글을 그 집안의 후대 사람이 올린다는 것이 그렇게 모양새 좋은 일만은 아닐 것 같군요. 그렇지만 옛날 사람들이 어떤 말을 했으며, 또 어떤 생각을 하고 사셨는지를 알려줄 자료를 접하기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계기야 어떠하든간에 자료를 접하는 기회를 만들어 드린다는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한두주에 한번씩 글을 올려놓을 계획입니다.
그래도 불만이 있으신 분들은 자신의 선조의 글을 저에게 복사해서 보내주세요. 그러면 제가 미숙하나마 번역해서 이곳에 올려 놓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이러한 작업이 '영주문화'를 좀더 내밀하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삼루암기(三陋庵記)

내가 사는 곳과 가깝고 교분도 깊으며 나이도 서로 같아서, 함께 글방에 노닐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하산(夏山) 성맹성(成孟省)군의 선친이신 처사공(處士公)이다. 성맹성은 선대에 맺었던 나와의 우의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데, 그와 나는 다만 나이가 같지 않을 뿐이고, 사는 곳과 교분은 옛날 그대로이다. 최근에 맹성이 기목(基木)의 봉암촌(鳳巖村)으로 이사를 했는데, 내가 사는 곳과는 한나절 길 정도 떨어져 있다. 내가 늙었기 때문에, 그가 사는 곳에 한번도 찾아가 볼 수 없었던 점이 못내 한이 된다.
하루는 맹성이 내가 거처하는 두암(斗庵)으로 나를 찾아왔는데, 이에 내가 물어보았다.
"자네가 거처하는 산중에는 무슨 좋은 흥취라도 있는가?"
"다른 사람에게 들려 줄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암자를 삼루(三陋)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집의 모양이 누추하니 이것이 일루(一陋)이고, 집 앞에 돌이 있는데 그 형태가 볼품이 없으니 또한 일루이며, 집 주인도 보잘 것 없으니 이것이 또한 일루입니다. 합하면 누추한 것이 세 가지가 됩니다."
"자네의 선친은 옛집을 새로 중수해서, 집과 계단 그리고 뜰이 아름답게 잘 정리되었었지. 자네가 그 집을 버리고 궁벽한 산중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으니, 지금 집은 당연히 누추할걸세. 자네의 옛집은 개울가에 있었는데, 넓은 논밭과 훤한 모래사장이 기름지고 깨끗하지. 이런데다가 지금 그대가 사는 기목읍은 평소 석악(石惡)이라고 불려지고 있으니, 돌 또한 당연히 볼품 없겠지. 그런데 이 집의 주인은 바로 자네라고 할 수 있는데, 자네는 선친의 시와 예를 배워서 풍모가 넉넉하며 자네의 말에는 음미할 부분이 있다네. 자네에게 어찌 누추한 점이 있겠는가?
집이 누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세이니, 자신의 정신을 누추하게 할 수 없지. 또한 돌이 누추한 것도 땅이 그러하기 때문이니, 나의 마음을 누추하게 하지는 못 하네. 이 두 가지의 누추함이 어찌 주인에게 근심이 될 수 있겠는가. 정말로 주인이 누추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야. 이렇게 자네는 결코 누추하지 않으니, 비록 '누추하다, 누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자네에게 달린 것이기는 하나, 나는 믿지 못 하겠네.
옛날에 오랑캐 땅으로 유배를 갔던 사람이 있어도, 자신의 집을 누암(陋庵)이라고 이름한 사람이 있었던가? 지금 자네는 집이 누추하다고 해서 자신의 근심으로 여기지 않고, 돌이 누추하다고 해서 눈의 근심으로 여기지 않고 있으니, 나는 정말로 자네가 누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네. 더군다나 자네의 몸과 마음에 있어 누추하다고 할 만한 바가 있는가? 아! 나는 잘 알고 있네.
집 모양이 누추하지만 집의 가풍은 밝을 것이요, 돌 모양은 누추하지만 돌의 재질은 단단할 것이야. 주인이 스스로 누추하다고 이름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누추하지 않네. 누추하다고 하는 세 가지는 모두 겉보기로 그러하다는 것이지, 그 실제는 누추한 것들이 아니지. 내가 보건대, 세상에서 겉보기만 누추한 자들은 스스로 자신의 누추한 점을 말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누추한 점을 지적해도 그냥 받아들이고 변명을 하지 않지. 그러나 가슴속이 정말로 누추한 자들은 스스로 그 누추한 점을 숨겨버리려고 할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누추한 점을 지적하면 노여워하면서 받아들이지를 않네.
지금 자네는 누추한 것을 미워하지 않고, 곧 누추한 집과 누추한 돌로 자신의 누추함을 밝히려 하고 있네. 아! 그대는 정말로 변변치 않은 사람이 아니야. 겉보기만을 신경쓰는 사람은 마음 속이 반드시 누추하지. 자네는 더욱 힘써서 변심하지 말게나."
"선생님이 저를 일깨워주셨습니다. 지금의 말씀을 글로 써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것을 가지고 아침저녁으로 저의 생활을 반성해 볼 것입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집 이름을 삼루라고 해놓고 거기다가 다시 내 누추한 말을 더하면, 사람들이 장차 '사루(四陋)'라고 할텐데, 그러면 어쩌지? 그래도 일찍이 내가 자네 선친인 처사공과 함께 교분을 쌓았었는데, 지금 자네 청에 내가 말을 아낄 수 있겠는가?"


구봉정사기(九峯精舍記)

도연수석(陶淵水石)은 화산(花山)의 동쪽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옛날 숭정처사(崇禎處士)가 은거하던 곳이기도 하다. 도연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동쪽으로 비스듬히 가다가 다시 남쪽으로 돌아 십여 리 정도를 가면, 한 작은 마을에 이르게 된다. 이 마을은 구수(九水) 혹은 수비(水非)·구류(九流) 등으로 불리고, 때로는 귀현(龜峴)이라고도 한다. 고개에 거북이처럼 생긴 곳이 없어서, 귀현이라는 이름이 유래한 바는 잘 모른다.
이 마을의 동남쪽과 서북쪽은 모두 산이다. 그리고 냇물이 이 양쪽 산 사이를 따라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다시 동쪽을 둘러 가다가 북쪽에서 도연에 이른다. 관에서 정비한 길은 마을 뒤에서 시작해 마을 왼쪽으로 나있고, 그 길을 따라 앞으로 나가면 청효읍(靑梟邑)과 자해읍(紫海邑) 등으로 통하게 된다.
이 마을 사람들은 농사에 힘을 쏟고 있으며, 해산물이 유통된다. 예부터 이 마을에는 현달한 사람이 거처한 적이 없었다. 사방을 두르고 있는 봉우리는 농민들과 나무꾼들에 의해서 훼손됨을 면치 못하였다. 이 마을의 풍속은 매우 속되어 우아하지 못한데, 능히 그러한 풍속을 새롭게 진작시킬 수 있는 자가 없었으니, 형세상 어쩔 수 없다고 하겠다.
나의 누나의 아들인 김붕운(金鵬運)군은 숭정처사의 후손이다. 그의 집안이 지계(芝溪)의 국간(菊澗)에서 이곳으로 이주한지는 이제 겨우 3세(世)가 되었을 뿐이지만, 그러나 벌써 이 마을의 풍속을 변화시킨 바가 있었다. 그는 그이 재종조(再從祖)이신 난곡옹(蘭谷翁)에게서 학문을 배워,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분별을 익히 들었다. 또한 바탕이 온화하고 행실이 바르며, 실제적인 공부에 마음을 가져서 명예 같은 것에는 뜻을 두지 않는다. 그는 새로이 초가 몇간을 지었는데, 그 형태가 매우 잘 잡혀 있다. 그리고 퇴계(退溪) 이선생(李先生)의 『십도(十圖)』를 벽에 걸어 놓고, 아울러 여러 선배들의 유문(遺文)을 가져다 두고는, 그 가운데서 조용히 거쳐하면서 날마다 학업에 힘쓰고 있다.
김붕운은 집안에서 보이는 봉우리 가운데서 완상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은 전부 품평하여 그 이름을 새로이 지었다. 동쪽의 두 봉우리는 노래(老萊)·토월(吐月)이라고 지었고, 서쪽 봉우리는 격진(隔塵), 남쪽의 네 봉우리는 독필(禿筆)·연적(硯滴)·은무(隱霧)·앙덕(仰德), 북쪽 봉우리는 와룡(臥龍)·채약(採藥)이라고 각각 이름을 붙였다. 어떤 것은 봉우리의 원래 명칭과 비슷한 것을 따서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봉우리의 모습을 형상화할 수 있는 것을 따서 그렇게 부르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것은 그가 직접 답사하여 떠오른 느낌에 맞게 이름을 붙인 것도 있었다. 그는 이렇게 이 9개의 봉우리를 종합하여 자신의 집을 '구봉정사'라고 하였던 것이다.
내가 듣고 신기하게 여겨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거명하면서 이유를 물었다. 김붕운은 사방으로 서서 그 봉우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이름의 뜻을 말해주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조물주가 어떤 뜻을 가지고 이렇게 한 것은 아니야. 이름을 붙인 것은 사람일뿐이지. 마음을 즐겁게 하고 구경하기에 좋은 것을 억지로 이름 붙여 놓고서는 '무슨 산'이라고 하는 것이다. 산령(山靈)에게 지각이 있다면, 아마 너에게 기꺼이 가르침을 받으려 할 것이고, 또 너를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좌와(坐臥)간 구경거리가 돼 줄 것이다.
그러나 산은 진실로 마음이 없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린 것일 뿐이지. 그것을 단순히 구경거리로만 써서 심신을 평안히 거두어들이는 밑천으로 삼지 않는다면, 저 봉우리들은 그저 좌우에 높이 솟아있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너에게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보이면서 수간의 너의 집 소유가 될 수 있겠느냐.
내가 오다가 도연을 바라보니, 그 수석(水石)들이 매우 기이하더라. 그런데 너의 선대 처사(處士)분들께서 그것들의 주인이 되셔서 그것들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더라면, 어찌 밖에 이름이 알려졌겠으며, 후세에 전해져서 사람들이 사모하는 정을 담아내고 존경심을 일으키는 바가 될 수 있었겠느냐. 구봉(九峯)이라는 너의 집 이름은 매우 그럴 듯하다만, 다만 이름만을 붙이고 그친다면, 너의 집은 어떻게 이름 그 이상의 귀한 것이 되겠느냐.
노래(老萊)는 효자이고, 와룡(臥龍)은 왕을 보필한 신하이지. 토월(吐月)은 빛이 나며, 격진(隔塵)은 고요하다. 은무(隱霧)는 지혜를 상징하며, 앙덕(仰德)은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행실을 닦는 바이다. 채약(採藥)은 생명을 기르는 것이고, 몽당 붓과 벼루는 모두 나를 도와주는 것들이지. 너는 이름을 돌아보면서, 그 이름의 뜻을 생각해 보기나 하였느냐?"
김군은 놀라면서 말하였다.
"저는 그냥 이름만 붙였을 뿐입니다. 그 이름의 실제 쓰임을 얻어내지는 못했습니다. 외숙께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너의 스승인 난옹은 내가 존경하는 분이다. 세상의 학자들은 겉을 꾸며서 그 내면을 분식하려고 하지만, 오직 난옹은 마음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이 그 외면에도 나타나 명과 실이 상부하고 아는 것과 행동이 모두 지극하셨던 분이시다. 그에게서 들었던 바를 잘 따라서, 네가 능히 자신을 위하고 남에게 아첨하지 않으며 실용에 힘쓰고 허명(虛名)에 힘쓰지 않는다면,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며 너의 스승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게 될 것이다. 나아가 네가 구봉의 주인이 됨에 있어서도 어떤 문제가 있겠느냐."
김군이 나에게 그 말을 적어 달라고 청하니, 나는 이것을 「구봉정사기」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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