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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2009 문화유산 답사기] 왕실의 후손, 240여 년 전 이곳에 거하다

[2009년 상반기 문화유산 답사기 은상 수상작]

   

왕실의 후손, 240여 년 전 이곳에 거하다

 

 

김재범

 

  

2009년 5월 22일 금요일 아침 10시 30분 강변역에서 나는 남양주시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에게는 카메라만이 손에 들려있었다.

가끔 혼자 떠나는 여행을 즐기는 나에게 비록 멀지 않은 곳이지만 잠시 서울을 벗어난다는 것으로 만으로도 흥분되는 여행이었다.

전날에 내린 비로 날씨는 조금 쌀쌀했지만 공기는 맑았고, 맑은 공기 때문인지 청량한 기운이 들었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40여분을 달린 나는 남양주시 평내동에 도착하였다.

내가 오늘 가고자 하는 곳은 이곳에 위치한 ‘궁집’이었다.

<궁집은 찾기 쉬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큰길가에서 약 90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에 표지판만 보고 쉽게 찾아 갈 수 있었다 >

 

궁집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英祖:재위 1724∼1776)가 사랑하는 막내딸 화길옹주(和吉翁主)가 능성위 구민화(具敏和)에게 시집가게 되었을 때 지어준 집이다.

궁집이라고 불리게 된 까닭은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를 보내 완성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집은 큰길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찾기가 매우 쉬었다.

하지만 사유지에 위치한 까닭에 관리자에게 연락을 드려 사정한 연후에야 들어 갈 수 있었다.

궁집 주변은 철제 펜스와 철조망이 이중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궁집은 위치하고 있는 장소가 아주 오묘했다.

궁집이 위치한 곳은 평내동의 주택 밀집 지역이었다.

그래서 주변에는 높은 아파트들이 있었고, 상가 역시 많았다.

하지만 궁집이 위치한 장소만큼은 숲과 옛 건축물로 둘러싸여 있어 조용하면서도 옛 조선시대로 들어서는 기분이 드는 곳이었다.

 

궁집에 들어섰지만 인적은 드물었다.

나를 궁집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해주신 관리자 외에는 왕래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하였다.

관리자의 허락 하에 나는 궁집의 답사와 사진촬영을 시작 할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정오를 가리켰다.

시원했던 날씨는 어느덧 해가 쨍쨍해졌고, 충분히 땀을 나게 할 만큼 더웠다.

하지만 궁집은 숲에 둘러싸여 있어서 그런가 바람이 시원했고, 그늘도 많아 생각보다 덥지는 않았다.


나는 가장 먼저 정문을 찾았다.

그러나 현재는 정문이 사용되고 있지 않았다.

정문이 있고, 열려있었지만 궁집 바로 옆에 관리자의 사가가 있었기 때문에 사가 앞으로 뚫린 길을 주로 사용하는 듯하였다.

그 길은 궁집의 대문 앞과도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정문으로 궁집에 들어섰다.

화길옹주와 구민화가 다녔던 길로 궁집을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살짝 열린 정문으로 살펴본 궁집은 마치 나무들 사이에 숨겨져 있는 듯 해 보였다 >

 

정문으로 들어서자 길 좌측으로 길보다 약간 높은 곳에 궁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궁집 주변에 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궁집의 모습은 마치 나무들의 사이에 숨어 있는 듯하였다.

 

궁집의 대문 앞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대문은 잠겨있었다.

아니 모든 문이 잠겨있었다.

어쩔 수 없이 관리자의 사가 옆으로 돌아 궁집에 들어갔다.

아쉬웠다.

대문을 통해 궁집에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평소에는 궁집으로의 입장이 아예 불가능하지만 허락을 받고 궁집을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 들어가자 제일 먼저 안채의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안채 앞마당으로는 부엌을 통해 들어 갈 수 있었다.

드디어 궁집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여러 고택(古宅)을 다녀봤지만 궁집에 가장 힘들게 입성한 것 같았다.


사진을 촬영하면서 건물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300여 년 전의 건물이지만 옛 모습이 잘 남겨져 있었다.


안채는 전형적인 'ㅁ'자형으로 당시의 모범적인 안채의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네 칸의 부엌, 네 칸의 대청과 세 칸의 방과 한 칸의 앞퇴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 남쪽 좌우의 날개는 방과 곳간이고 남행랑에는 곳간과 중문이 설치되어 있다.

중문은 두 칸으로 만들어 내외벽을 구성하는 여유를 지녔다.

사랑채는 안채의 서남쪽에 있는데, 'ㄱ'자형의 평면으로 두 칸의 방 이외에는 전부를 마루로 깔았다.

간반통 4칸이며, 서남쪽으로 내루(內樓) 한 칸이 부설되었다.

하지만 건물 군데군데에 전선·형광등 등의 현재의 문명들이 있어 그 모습이 조금 아쉬웠다.

 


사진을 찍으면서 궁집의 배경을 살펴보니 특이한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궁집은 주변에 나무들이 우거지어 있었는데, 궁집의 배경으로 멀리 높다란 아파트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파트는 궁집의 앞마당에서보도 보였고, 뒤뜰에서도 보였다.

처음에 300여년 된 고택에서 보이는 아파트의 모습은 고택의 배경으로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과거와 현재의 조화가 이루어진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궁집에서 과거와 현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시간 여 답사를 겸한 사진촬영이 계속 되자 더운 날씨로 인해 땀이 많이 났다.

그래서 잠시 촬영을 멈추고 마루에 앉아서 쉬는 시간을 갖았다.

내가 답사 간 날은 마침 건물 내부 환기와 건조를 위해 통풍을 시키는 날이었다.

조선시대 기와집이 다 그렇듯이 궁집 역시 사방에 창문이나 문이 있었다.

마루에 앉아서 잠시 땀을 식히니, 열려져 있는 문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와 금세 더위가 가셨다.

아마 더운 여름에도 통풍을 시키면 궁집의 내부 역시 시원할 것 같았다.

잠시간의 쉼을 마치고 다시 촬영을 시작하였다.

 


궁집이 갖고 있는 건축미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처마나 지붕 곡선의 아름다움은 한국의 미를 그대로 담고 있었고,

오밀조밀한 건물의 배치 역시 마치 작은 궁궐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장독대와 부엌 등 역시도 잘 보존되어 있어 건물의 고전미를 더욱 부각시켜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휴식 뒤에 사진촬영에 힘쓰기 보다는 궁집이 갖고 있는 건축미를 느끼는데 힘을 썼다.

답사를 다니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건축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면 기분이 좋고,

건축물이 훼손되어있거나 보수 또는 재건축 되어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이 궁집을 보니,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아 기분이 좋았다.

아마 사유지에 있는 건물이라 보존상태가 좋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유지에 있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웠다.


그렇게 1시간 30여 분을 넘게 답사를 한 나는 관리자분께 답사가 끝났다는 전화를 드리고 궁집을 떠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출발하여 다시 집에 도착할 때까지 4시간 여정도 소요된 짧은 답사였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짧은 답사지만 잠시 혼자 서울을 떠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여유로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으며,

서울 근교에도 많은 문화재와 유적·유물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곳을 찾아가는 것이 어렵자만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문화재와 유적·유물 보존의 중요성과 그런 것들을 대중들에게 더 알려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4시간여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잠시 과거로, 자연으로 여행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