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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2009 문화유산 답사기] 무기연당에 춘풍은 파랑을 만들고

[2009년 상반기 문화유산 답사기 금상 수상작]

 

무기연당에 춘풍은 파랑을 만들고

 

정진해

 

 

2009년 5월 7일 설잠에서 깨어보니 밖은 훤히 밝아 왔다.

문화재지킴이 활동과 답사를 한지도 벌써 3일째가 되었다.

집 떠나오면 고생이란 말은 있으나 늘 해오던 지킴이활동이라서 몸에 익숙해져 있다.

문화재 지킴이 활동을 하기 위해 출발하는 날이면 부산한 준비에 바쁘기만 하다.

아내와 함께 준비해간 반찬으로 한 끼의 아침을 해결하고 칠원면으로 향한다.

들에는 농부들의 움직임이 바쁘고 봄이 왔음을 느낀다.

과수원에서 일하는 사람들, 밭에서 김을 매는 사람들, 논에서 놀갈이를 하는 사람들로 농촌은 바쁜 하루가 시작되었다.

강둑을 따라 한 대의 차만 갈 수 있는 좁은 길을 가보니 낙동강이 한 눈에 들어왔다.

조용히 흐르는 강물과 과수원에 피어난 꽃들과 하루를 시작하게 되어 마음은 매우 상쾌하였다.

 

<경남 함안군 칠북면 봉촌리에 위치한 광심정은 경남문화재자료 제217호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 현종 5년(1664)에 성리학자 송지일 선생이 칠원북쪽,

자모산 기슭 낙동강 절벽위에, 정자를 세워, 그의 호를 따라서 "廣心亭“으로 편액하였다

 

절벽 위에 작은 정자를 둘러싼 담 넘어로 지붕이 보였다.

찾아간 광심정은 대문이 굳게 닫고 나를 맞이한다.

이 정자는 조선의 성리학자인 송지일 선생이 낙동강의 흐름을 벗삼아 이곳에서 학문을 논하는 장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었다는 정자이다.

차곡차곡 쌓아 만든 높은 단 위에 둘러진 토석담에 기왓장을 얹었고 큼직한 대문 옆으로 담에 기대어 안을 들어다 보았다.

작고 아담하게 지어진 정자는 팔작지붕에 앞쪽은 마루를, 뒤쪽은 방을 두었다.

방의 벽은 모두 창호를 바른 정자살창벽이다.

오른쪽엔 안쪽으로 긴띠살문짝을 달았고 왼쪽엔 바깥쪽으로 작은 띠살문 2개를 달아 여닫이로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낙동강바람을 맞으며 문인들이 모여 앉아 차를 마시며 시상을 띄우는 경치 좋은 위치에 단조롭게 서 있는 모습이 선비의 섬세함을 읽을 수 있었다.

 

 

함안 무기 연당 연못가에 세운 정자이다.

한서문을 들어서면 연못 왼쪽편에 하환정이 자리잡고 있다.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로,1칸은 방이고 나머지는 마루를 깔아 놓은 작은 건물이다.

풍욕루는 댓돌을 높이 쌓고 앞뒤퇴가 있는 3간을 구조하였다.

역시 홑처마의 팔작기와지붕인데 이들은 후대에 세운 건물들이다 >

 

몇 곳의 문화재 지킴이 활동을 하고 무기리에 있는 무기연당으로 향했다.

몇 해전에 이곳을 찾았을 때 보다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을 길을 접어들자 좁은 골목으로 걸었다.

호박돌과 황토를 빚어 층층이 쌓아 올린 담장이 전통이란 단어를 떠 올리게 한다.

솟을대문은 중앙 문짝이 활짝 열려 있고 문화재 안내판은 이곳이 “함안 무기리 주씨고가“라 알려주고 있다.

안내판의 내용은 ”이 마을은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상주 주씨들이 이주하여 와서 생겨난 집성촌이다.

이곳은 국담 주재성(1681~1743) 이후 주씨 집안의 종가로서 그 위상을 유지해온 집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당엔 자갈로 깔아두어 밟는 소리가 자박자박 경쾌하게 들린다. 영귀문 옆에는 ”함안무기연당“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이곳은 조선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국담 주제성선생의 유적지이다.

국담 선생은 주자학의 의리 탐구와 실천에 독실했던 재야 주자 학자로, 사후에 벼슬이 올려지고 기양서원에서 제사를 받았던 인물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군수품 조달을 위해 재산을 팔아 쌀 300섬을 내놓았으며,

난이 평정 된 후 조정으로부터 벼슬이 내려졌지만 끝내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과 후진양성에만 힘썼다"고 한다.

3단의 계단에 올라서 한서문을 들어섰다.

중요민속자료 제208호로 지정된 함안무기연당이 보였다.

이 연못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관군들과 함안 의병들이 주재성의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이 마을 들머리에 '창의사적비'를 세우고 주재성이 글을 읽던 서당 앞에 만든 연못이라고 한다.

방형의 연못에 작은 원형의 섬 하나에는 수 많은 기암괘석이 총총히 둘러져 있고 작은 식물이 봄을 열며 천천히 싹을 띠우고 있다.

이것이 국담이다.

주위의 작은 돌들은 마치 바닷가의 절벽아래 우뚯 솟아 있는 촛대와 같은 형상을 하는 것과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한 경사지의 아슬아슬한 돌들과 같고,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형상의 돌들도 있다.

섬 위에는 연당의 역사와 함께한 노송이 그늘을 만들고 있어 서로의 정겨움을 더해주고 있다.

충효각 뒷담 넘어 불어오는 봄의 전령사는 석가산을 넘어 풍욕루과 하환정을 돌며 연당에 가만히 잠긴다.

 

 < 인간의 마음은 본래 착한 것이므로 마음이 처음 밖으로 나타날 때에는 남을 사랑하고 돕는 방향으로 나타나지만,

이때 생각이나 헤아림이 이기적으로 작용하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치는 악한 마음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나 헤아림 자체를 중지시키면 악한 마음으로 변질되지 않기 때문에 착한 마음을 계속 보존할 수 있다는 깊은 뜻을 말하는데,

이곳 풍욕루에 머물면 경의 깊은 뜻을 간직하고 실천하라는 것이 아닌가 한다 >

 

'못을 바라보며 즐겁게 사는 세상살이를 어찌 벼슬 따위와 바꿀 수 있겠는가'라는 뜻을 가진 하환정은 아담한 정자에 신발을 벋고 올라선다.

국담 선생은 벼슬을 내린 임금께 돌려주고 초야에 묻혀 자연에 순응하며 현실의 삶과 바꾸지 않겠다는 의지로 하환정이 하루의 일터가 되지 않았나 한다.

연당이 바로 제일강산이라 걸려있는 편액의 글귀에도 선생의 마음속 깊은 뜻이 가득 묻어나 보인다.

툇마루를 두른 고란과 주심기둥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 느껴진다.

흘러간 세월동안 누군가 이곳에서 국담 선생과 같이 자연에 순응하며 현실의 삶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 새겨놓은 많은 편액에서 하환정의 넘치는 자연을 맛볼 수 있다.

팔각지붕에 정면2칸 측면2칸에 정면엔 난간을 둘렸고,

넓은 돌을 다듬에 사용한 기초석 위의 기둥은 오랜 세월동안 전체를 지탱해 주고 있다.

마루 앞에 둘러진 난간은 더 이상 앞으로 가면 연당에서 자연의 세계와 이상의 세계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경계 표시가 아닐까 한다.

하환정에서 다섯 발자국 정도이면 닿을 수 있는 풍욕루는 '바람에 목욕을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자연석 널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린 기단위에 높낮이가 각기 다른 초석을 두고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와 주심포가 들어나 보이는 팔각지붕을 한 민도리 양식의 건축물이다.

각 측면에 1칸씩 방을 두었고 그 가운데를 틔워 대청마루를 놓았다.

처마밑에 걸려있는 풍욕루의 편액과 대청마루벽에 걸려 있는 “敬”편액이 걸려있다.

생각이나 헤아림을 중단한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라는 경고가 아닐까 한다.

즉 인간의 마음은 본래 착한 것이므로 마음이 처음 밖으로 나타날 때에는 남을 사랑하고 돕는 방향으로 나타나지만,

이때 생각이나 헤아림이 이기적으로 작용하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남을 해치는 악한 마음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이나 헤아림 자체를 중지시키면 악한 마음으로 변질되지 않기 때문에 착한 마음을 계속 보존할 수 있다는 깊은 뜻을 말하는데,

이곳 풍욕루에 머물면 경의 깊은 뜻을 간직하고 실천하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대청마루에 앉아 경계선을 넘어 바라보니 단아한 하환정과 한서문 그리고 국담이 한 눈에 가득 찬다.

일어서니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과 나가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멀리 길을 걷는 사람과 들판의 사람들을 볼 수 있어 갇혀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담 옆에 기대에 오래도록 살아온 노송은 국담의 햇빛을 막아주고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의 그늘이 되어주며,

멀리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어 주고 있다.

연담 주위를 돌아 충효각과 영정각 앞에 서서 국담과 하환정 그리고 풍욕루를 바라보면 넓고 넓은 풍광을 축소하여 한곳에 모아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유로운 마음에 있어야할 것이 모두 담겨있는 연당에는 지나가는 구름의 모습도 만들어 주고 날아가는 새의 날개짓도 그려놓는다.

어디에선가 들어오는 작은 물줄기가 모이고 모여 넘칠 때가 되면 스스로 말없이 어디론가 가버리는 연당을 아름답게 수 놓던 물들이 지금도 더 넘치지도 않으면서 한결같은 높이로 스스로 조절하고 있다.

오늘 따라 봄의 햇살이 여름과 같았다.

시원한 차림으로 답사를 시작하였지만 온몸은 땀으로 얼룩지기 시작한다.

하환정에서 바라보면 눈이 맞닿는 곳이 충효각이다. 아직 세월의 때가 깊지 않은 모습이다.

맛배지붕에 둥근풍판을 달고 있다.

색감은 다소 빛은 바랬지만 기둥의 질감은 오랜 역사를 간직하였다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

옆에 자리잡고 있는 영정각도 맛배지붕에 풍판을 단 건축물이다.

하환정에서 풍욕루에서 연당을 바라보면서 자연의 세계와 이상의 세계를 함께 조화롭게 볼 수 있었던 때에는 마음의 풍요로움을 느끼지 않았나 한다.

지금은 멀리 바라보는 시야에 충효각과 영정각이 가로막혀 옛 정취를 맛보지 못하는 이런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아름다운 우리의 옛 모습의 정원을 둘러보고 한서문을 나섰다.

자박자박 소리를 내면서 감은재 대청마루에 잠시 앉았다.

정면 3칸 측면 2칸에 대청마루를 둔 감은재에는 국담문집책판 56매가 보관되어 있다.

국담문집은 1908년, 주재성의 후손들이 4권 2책으로 엮은 책으로 주재성이 쓴 시와 문장, 제문, 상소문 등이 실려있으며,

그중 1728년, 영조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국담이 영남의 사림들에게 보낸 호소문이었던 '倡義文‘은 유교를 뿌리에 둔 군신관계를 강조한 대표적인 글이라 한다.

솟을대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몸으로 느끼며 긴 담으로 둘러진 연당의 끝과 끝을 바라보면서 지붕만 보이는 하환정과 풍욕루,

노송이 가리켜준 기준점 아래의 국담을 생각하면서 옛 주인의 정신을 가름해 본다.

감은재 앞뜰 한 귀퉁이에서 자라고 있는 마늘은 아직 꽃대를 내지 않고 있다.

국담 주재성선생의 생가는 지금은 그 후손이 기거하고 있어 사생활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열린 중문에서 눈으로 보기만 하고 나섰다.

삼문을 나와 들어갈 때 지나친 문을 보면서 붉은색으로 단청을 한 것이 다른 고택에서 보기 드문 것과 지붕아래에 “忠臣旌閭”와 “孝子旌閭”의 글귀가 새겨진 붉은 편액이 걸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충신정려”는 국감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영조대왕이 내렸고,

“효자정려”는 이인좌의 난 때 그의 아버지를 따라 전장에 나가 함께 공을 세운 업적을 기려 철종때(1859)에 하사한 정려라고 한다.

사대부가의 내리 충효정신에 깊은 감동을 받을 후세의 본보기로 오래오래 남을 것이다.

들어왔던 골목길을 따라 현대 물결에 요동치는 또 다른 과거속으로 빠져들기 위해 다음 문화재를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