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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명성황후(明成太皇后 閔氏)







명성황후(明成太皇后 閔氏)

1895년 10월 8일. 
이날은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의 칼에 시해된 날이다. 
이웃나라의 왕궁에 자객을 보내 왕비를 참살하고 
시신을 능욕한 사건은 세계사를 통틀어 달리 찾아볼 수 없다. 
이 사건은 우리에겐 지금도 치유되지 않은 아픔이지만 
일본엔 ‘존재하지 않는 역사’처럼 돼있다. 
명성황후의 眞影은 아직 확인이 안되고 있다. 
이하 Google의 [위키백과]를 참고 하여 편집했음을 밝혀둔다.
 
명성황후(明成太皇后 閔氏)
1851년 음 9월 25일~1895년 음 8월 20일
       
      1851년 음력 9월 25일, 
      현재의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1 출생.
      아버지 閔致祿과 그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1남 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황후는 어려서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9세 때인 1858년 아버지 민치록이 죽자 습렴하는 모습을 
      어른처럼 지켜보아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외척으로 인한 폐해가 없으리라 기대한 흥선 대원군의 뜻에 따라 
      1866년 음력 3월 6일 왕비로 간택되어 
      별궁인 운현궁에서 지내다가, 음력 3월 20일 고종의 왕비가 되었다. 
      당시 서구 열강의 개항 압력이 프랑스(병인양요, 1866년), 
      미국(신미양요, 1871년) 등과 같은 
      강화도에서의 군사 분쟁으로 나타났으나 
      흥선 대원군은 단호한 집념으로 이들을 물리치고, 
      국내적으로도 경복궁을 중건하고, 
      민중들을 수탈하는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정리하는 등 
      전제 왕권 강화를 분명히 하였다.
      1868년 궁인 이씨가 완화군을 낳았는데, 
      흥선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면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대원군의 반대 세력을 규합하여 세력 기반을 이루었다. 
      1871년 첫 아들을 낳았으나 태어난 지 나흘 만에 죽자, 
      이를 대원군의 탓으로 돌려 갈등이 커졌다. 
      1874년 음력 2월에 태어난 척(?)이 이듬해 음력 2월 
      세자가 되었다. 
      그 뒤로도 아들 둘과 딸 하나가 더 태어났으나 일찍 죽었고, 
      살아남은 아들 척에게 더 정성을 쏟게 된다.
      1873년 흥선 대원군의 집권이 끝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자 
      명성황후는 민씨 집안 사람 몇몇을 조정의 요직에 앉혔다. 
      대외적으로도 쇄국을 버리고 1876년 병자 수호 조약을 
      체결하는 등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자 
      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중도 개화파를 지원하였다.
      한편 1874년 선물로 위장된 폭탄이 터진 폭탄테러로 
      오라비 민승호와 그의 아들, 어머니 3대 사망하였고 
      폭사 배후로는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
      명성황후는 민씨 조카들을 등용하여 울타리를 쳤다. 
      1881년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이 유생을 동원하여 
      대신들과 민씨 척족을 몰아내려다 발각된 사건이 발생한다. 
      이 두 사건의 배후에 흥선대원군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1882년 차별대우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구식 군대가 
      군란을 일으킨 임오군란 당시 구식 군대의 추대로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고, 
      명성황후는 홍계훈(洪啓薰)의 등에 업혀, 
      장호원을 거쳐 충주로 피신한다. 
      이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 보고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의 톈진으로 압송된다. 
      1개월 만에 고종이 복권하였고, 
      서울로 돌아온 황후는 민씨 척족을 더 등용한다. 
      흥선대원군의 도발이 오히려 민씨 척족을 단결하게 만든 셈이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갑신정변으로 조정의 실력자(이기도) 민씨 척족 상당수가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살생부에 올라 
      죽음을 당하고 심지어 자신의 개인 비서인 
      내관 유재현까지 살해된다. 
      이 일로 말미암아 일본과 급진 개화파를 경계하며 
      의심하고 멀리하게 된다.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지원을 요청해서 
      개화당을 붕괴시켰으며, 
      이후 청나라의 횡포에 대응하여 러시아에 접근했다. 
      그러나 이를 우려한 영국이 군함을 보내 
      1885년 거문도를 일방적으로 장악하고 
      청나라도 흥선 대원군을 돌려보내는 등 
      제어 조치를 취하여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1892년 봄 운현궁에서 화약이 터지고 
      흥선대원군의 사랑채등 여러곳에 폭약이 장치된 것이 
      발각되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의 오라비인 민승호에게 
      폭약을 보내 일가를 폭사시켰던 전례에 대한 
      명성황후의 정치적 보복극이라는 의심을 받게 된것이다.
      1894년 동학란이 일어났다. 
      이때 排日로 돌아선 고종과 황후 세력 및 
      동학군을 진압하려고 출동한 청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은 그들과 대립 관계에 흥선대원군을 앞세운다. 
      그해 음력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군을 투입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일시적으로 흥선대원군을 내세웠다. 
      이튿날인 음력 6월 22일 흥선대원군은 측근 이원긍을 
      오토리 일본 공사에게 보내 명성황후 폐서의 취지가 담긴 
      문건을 제시하고 동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스기무라 서기관을 비롯한 일본 공사관 요원들이 
      거절하여 무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대원군 세력을 달포 만에 끌어내린다. 
      그 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김홍집내각을 앞세워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한다. 
      그때 황후 세력은 모두 유배된다. 
      명성황후도 경기 감사 홍순형(洪淳馨)의 집에 피신한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직후 서양 삼국, 
      곧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간섭하여 
      청일전쟁에 승리하여 얻은 이권을 내놓게 하였는데,  
      이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서의 지위도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주시하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일본보다 훨씬 강하게 여겨지는 러시아와의 친분을 
      강화하려고 시도하였다. 
      즉 일본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 하였는데, 이는 정책상 일본에 불리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는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를 사주하여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낭인(떠돌이)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으로 침입, 고종 황제를 위협하였다. 
      그들은 옥호루에서 피신하는 명성황후를 발을 걸어 
      가슴을 수 차례 밟고 이어 난자 살해하여 
      그 시신을 궁궐 밖으로 운반하여 소각하였다.
      만행에 가담한 미우라를 비롯한 48명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을미사변은 고종이 아관파천을 결정하게 된 주요 원인이었고, 
      의병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명성황후는 시해된 후 “왕후”에서 폐위되어 
      서인으로 되었다가 같은 해 음력 10월 10일(양 11월 26일) 
      복위되었고 능호를 숙릉(肅陵)으로 하여 
      현재의 동구릉 경역내에 조성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1897년,대한제국이 수립된 직후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황후로 추존되었고 같은 해 11월 
      장례식을 국장으로써 다시 치르고 
      청량리동에 장사 지내었는데 능호를 새롭게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명성황후의 암살 배후는 일본측으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지목되었다. 
      암살의 국내 협력자로는 유길준과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다. 
      반면 유길준은 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의 한국인 
      주동자라고 지목하였다. 
      1894년 가을 명성황후가 개화당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꾸몄다가 대원군의 첩보망에 발각되었고, 
      "대원군은 일본공사 오카모토와 협의 끝에 
      일본인들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얻어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작전명은 ‘여우 사냥’이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정부와 무관한 극우파의 소행으로 
      축소하려 했으나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일본공사가 
      가담한 범죄였음이 외교문서 등을 통해 나중에 밝혀진다. 
      최문형 한양대 명예교수는 미우라는 종범(從犯)이고 
      주범은 미우라의 전임자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공사라고 
      지목한다. 
      이노우에는 일본 외상과 내상을 지내고 
      ‘조선 문제’에 관해 전결권을 부여받았던 인물이다. 
      결국 시해사건은 일본 정부가 주도한 국가범죄였다.

일본 구마모토현 아소국립공원 입구에 서 있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가담자인 마츠무라 다츠요시의 기념비. 그의 기념비 뒷면에 새긴 공적 내용에 "조선에 머물면서 동지와 민비사건에 관여"(오른쪽 첫 행) 라고 돼 있다. 이 기념비는 이 지역 몇몇 유지들이 그가 지역발전에 공헌한 행적을 기리기 위해 1966년(소화 40년)년 세웠다.
      
      [附記]
      일본전문가인 이종각 씨가, 
      최근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동아일보사 간행)를 
      펴냈다. 
      저자는 일본에 정보를 팔아넘기고 명성황후 시해를 도왔던 
      조선인 훈련대 대대장 우범선과 그를 살해한 자객 
      고영근의 행적을 따라가며 역사의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보여준다. 
      민씨 가의 노복 출신으로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던 
      고영근은, 
      일본으로 도망가 일본 여자와 결혼해 살던 우범선을 살해하고 
      체포된다. 
      고종황제는 여러 외교 경로를 통해 고영근의 선처를 요구해 
      그는 5년여 감옥살이를 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 후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을 지키는 능참봉이 된다. 
      일본 아사히TV는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당시 범인들의 후손이 
      100여 년 만에 한국을 찾아 사죄하는 모습을 담은 
      특집뉴스를 ‘보도(報道)스테이션’ 프로그램에서 14분간 방영했다.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라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본 미디어에 
      등장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뮤지컬 ‘명성황후’를 제작한 에이콤은 수차례 일본 진출을 
      모색했으나 일본 극우세력의 훼방이 예상된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한일 간 역사인식 격차를 줄이는 일은 사실을 아는 데서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