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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옥마을 수도리.... (무섬마을)

 

 

 

 

 

↑ 무섬마을 앞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 1989년 수도교라는 돌다리가 놓이기 전까지 밖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무섬마을은 전형적인 '물돌이마을'이다. 삼면이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멀리서 보면 수도꼭지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지려는 물방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강 한가운데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수도리'(水島里)라고도 부르는데, '무섬'은 그 뜻 그대로를 옮긴 것이다.

안동 하회와 예천 회룡포의 특징을 반반씩 섞어 놓은 곳이 바로 영주의 무섬마을이다. 마을의 규모로 따졌을 때 회룡포와 비슷하고, 그 내부 가옥이나 마을의 구성은 하회와 흡사하다.

무섬마을에는 총 48채의 가옥이 있다. 이 가운데 무려 16동이 100년 넘은 고택이다.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수도교 위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한옥과 초가가 어깨를 맞대며 어우러져 있다. 마치 하나의 민속촌을 보는 듯하지만 여느 민속촌과 다른 점이 있다면 50여 명의 주민들이 여전히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안타까운 것은 주민 대부분이 60대 이상의 고령이고 점점 그 인구도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빈집도 차츰 늘고 있다. 현재 마을에는 16채의 집에 사람의 온기가 없다.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예안김씨의 집성촌이다. 먼저 17세기 중반 박씨 가문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다가 18세기 중반에 증손녀사위인 김씨를 불러들였다. 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앞으로는 내성천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버티고 있다. 물에 갇혀 있는 형국이지만 예부터 이 마을은 수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부자마을로 유명했다. 한창 때는 농토가 마을 밖 30리까지 미쳤다고 전한다.

이 조그마한 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었고 '아도서숙'이란 글방을 건립해 농민계몽활동과 독립운동을 펼친 것이다.

아도서숙을 건립에 주축이 된 독립운동가 김성규는 시인 조지훈의 장인이다. 조지훈은 고향이 영양 주실마을이지만 무섬마을로 장가를 왔다. 그는 이 마을을 그리며 '별리'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지금이야 수도교가 마을로 편안히 이끌어주지만 예전에는 마을을 드나들기 위해선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방죽을 따라 돌다보면 외나무다리가 처량하게 놓여 있다. 외나무다리 건너기 등의 체험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이 다리의 원래 자리를 찾자면 수도교가 있는 곳으로 옮겨야 한다. 사실 무섬마을이 세상과 통하는 길은 수도교 외에도 하나가 더 있다. 수도교를 건넌 후 왼쪽으로 방죽을 따라 가면 무섬교라는 다리가 나온다. 2005년 준공된 다리다.

그런데 '과연 두 개의 다리가 필요하냐'는 의견이 있다. 입방아에 주로 오르는 것은 마을 뒤편에 있어서 먼저 설치된 수도교다. 수도교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예전의 외나무다리를 옮겨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야 훨씬 정감 있는 마을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무섬마을은 고택답사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해우당고택, 만죽재, 김뢰진가옥, 안동장씨종택 등 민속자료로 지정된 집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의 고택은 건물의 보존 상태도 상당히 양호하다. 이 고택의 사랑채에는 흥선대원군이 쓴 편액이 걸려 있다. 만죽재고택은 마을에 들어온 시조 격인 박수 선생의 집으로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무려 1666년에 건립되었다.

무섬마을에서는 '까치구멍집'도 꽤 볼 수 있다. 강원도 태백산 주변과 경상도 북부지역에 분포하는 산간벽촌 서민주택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옥형태로 지붕마루 양쪽 아래에 까치가 드나들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은 점이 다른 가옥과 구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