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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엔 끝이없다.^^*/아는것이 힘

[스크랩] 경복궁의 지광국사 현묘탑비를 배관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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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칭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 국적/시대 한국(韓國) / 고려(高麗) 재질 : 석(石) 지정구분 : 국보(國寶) 101호 용도기능 : 종교신앙(宗敎信仰) / 불교(佛敎) / 예배(례拜) / 탑(塔) 출토(소)지 : 강원도(江原道) 원주시(原州市) 富論面 法泉寺址 소장기관 : 국립중앙(中央國立) 박물관 이 승탑(僧塔)은 지광국사(智光國師)의 입적시 건립된 것으로 본래 강원도 원주시 법천사지(法泉寺址)에 있던 것이나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에 옮겨 세워져 있다. 이 승탑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이라는 승탑의 기본 형식에서 벗어나 네모진 평면형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보이고 있다. 건립 연대는 원위치에 보존되어 있는 탑비(塔碑)의 비문에 의하여 지광국사의 입적이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이므로 상한 연대를 이 때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기단부(基壇部)의 구조를 보면 7층을 헤아리는 석재 각 부분에 조각 장식이 가득하다. 구성은 지대석이 매우 넓고 층층의 높이와 넓이에 변화를 주었다. 특히 지대석 네 귀퉁이에는 용의 발톱 모양 같은 조각이 땅에까지 닿아서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최상층의 갑석(甲石)에는 화려한 장막 모양이 사면에 드리워져 장식을 더하고 있다. 각면에는 안상(眼象), 운문(雲文), 초화문(草花文), 보탑(寶塔), 신선 등이 빈틈없이 가득 조각되어 있다. 기단 네 귀퉁이에는 사자가 1구씩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어 도난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탑신(塔身)에는 앞뒷면에 문짝을 조각하였고, 좌우에 페르시아풍의 영창을 조각하였다. 옥개(屋蓋)는 천개형(天蓋形)으로 장막이 늘어지고 옥개석 낙수면에 해당하는 위치에 불, 보살, 봉황 등의 조각이 가득하다. 묘탑 전체의 형태가 자유롭게 조형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각 장식이 풍부하고 정교하다. 아울러 웅건한 기풍과 함께 기교가 능란한 점이 눈에 띤다. 고려시대의 승탑으로서 다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우수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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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조가 얼마나 그를 존숭했는지는 그의 묘탑의 화려함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부도에서 보기 쉽지 않은 평면 방형으로 안정감과 장중함을 보여주며 각 부재마다 사리 장엄구를 운반하고 있는 인물상, 구름, 신선들, , 산수풍경 등 정교한 문양들이 수를 놓듯 조각되어 있습니다.

 

현묘탑 문양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1층 탑신에 새겨진 이국적인 사람들이 가마에 사리를 운반하는 문양인데 원나라 시대의 가마와 그 가마를 들고 가는 사람들의 머리모양과 옷차림으로 볼 때 서역사람들을 표현한 것이 분명합니다.

머리 한 복판에 가르마를 탄 양머리 모양의 인물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하고,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의 카프탄(kaftan)류의 민족의상과 비슷하다. 카프탄은 이 그림에서 보듯이 동정이 없고 옷자락이 길며 품이 넉넉한 겉옷으로, 트인 앞쪽을 장식 띠로 여밀 수 있게 만든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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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옥신에는 사리 장엄구 외에도 구름 위에 서 있는 신선들, 구름 속에서 용트림하는 용, 산수 연운(煙雲) 풍경 등 피어오르는 구름을 배경으로 한 장식그림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무리를 이룬 신선들이 두 손 모아 약합(藥盒)을 받쳐 들고 구름 위에 차례로 서있는 장면은 묘탑의 분위기를 환상적인 세계로 이끈다. 같은 층 옥신에 장식된 운룡도는 주된 소재가 구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름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구름은 장식 미술의 대표적 소재로 고미술에 널리 활용됐다. 하지만 묘탑에서처럼 풍부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런 장식을 가한 이유는 구름 자체가 천변만화의 기운과 내재적인 기세, 그리고 강약과 허실을 동시에 갖추고 있어, 묘탑의 주인공을 신비화하는 데 가장 적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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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의 것으로 사진이 옆으로 누웠네요. 실수 기냥 고개를 돌려서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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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묘탑에 보이는 외래적인 요소는 이뿐만 아니라 2층 옥신을 장식하고 있는 문비(門扉)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문비의 기본 형태 즉, 두 개의 문짝, 광두정 철물 장식, 자물쇠 장식 등은 일반적인 탑이나 부도의 문비 장식과 같다. 그러나 문짝 윗부분에 해를 원형으로, 달을 초생달 모양으로 표현한 것은 옛 페르시아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해와 달을 다 같이 원형으로 표현하는 우리의 전통 방식과 다르다. 또한 굵은 실로 엮은 술(流蘇), 영락 등으로 화려하게 꾸민 장막과 드림새 장식도 외래적 요소이다. 이런 장식들이 묘탑 건립 당시에 서역과의 활발한 문화교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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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옥개석에도 역시 다양하고 아름다운 문양들이 가득 들어 차있다. 닫집 기둥처럼 허공에 매달린 옥개석 기둥에 영성(靈性)을 상징하는 화염보주와 부처님의 또 다른 화현인 화불(化佛)이 보이고, 기둥 사이에는 도교의 선녀를 닮은 비천(飛天)이 화려하고 환상적인 천의를 휘날리며 허공을 날고 있다. 옥개 네 모서리의 추녀 부분에는 긴 꼬리를 뒤 쪽으로 길게 늘어뜨리면서 하늘을 향해 비상하는 봉황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비천은 허공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며 꽃을 뿌려 부처님을 공양 찬탄한다. 불탑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반면 석등이나 부도에는 자주 나타난다. 현묘탑의 비천은 묘탑 주변 분위기를 신비화하고 묘탑 주인을 찬탄하고 기리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봉황은 태평성대에만 나타난다는 상상의 새로 묘탑을 신령스럽게 조성하는 효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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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륜부에는 초화, 앙련, 영지형 구름, 영락 드림새 장식, 가릉빈가 등이 더욱 현란하게 장식되어 있다. 돋보이는 것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태를 가진 가릉빈가이다. 팔각 모서리마다 한 마리씩 모두 여덟 마리를 새겨놓았다. 가릉빈가는 극락정토에 사는 새로, 자태가 매우 아름답고 소리 또한 오묘하여 묘음조(妙音鳥), 미음조(美音鳥)라고도 한다. 입적한 선사가 극락정토에 환생하기를 비는 마음을 표현하는 데는 이보다 적합한 소재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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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탑신에 문비 문양과 2층 옥개석 가운데는 부처를 모서리엔 봉황을 새겼으며 상륜부 여덜 모서리마다 불교 경전에 나오는 극락정토에 사는 새인 인두조신(人頭鳥身)의 가릉빈가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국사가 죽어 극락정토에 환생함을 기원하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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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가 너무 많으면 빈곤하고 미인은 박명이라 했던가요?

장중함과 화려함을 두루 갖춘 현묘탑은 원래 원주 부론면 법천리 법천사터에 현재 그곳에 있는 국보 제59호인 지광국사 현묘탑비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탑과 탑비는 거의 천 년 동안 나란히 서로를 보듬으며 있던 중 1911년 가을 현묘탑을 강제로 머나먼 이국 땅인 일본으로 무단 반출한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천 년 동안이나 서있던 현묘탑을 일본으로 무단 강탈했으니 말썽이 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여론이 악화되자 민족감정을 자극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조선 총독부가 일본인 소유자에게 압력을 넣어 1912년 다시 한국으로 가져와 당시 총독부가 있던 경복궁 뜰에 세워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현묘탑 안에 모셔져 있던 사리장신구와 경전들은 행방이 묘연한 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부도탑을 세운 이유는 바로 사리를 모시기 위함인데 사리기를 잃어버렸으니 심장을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의 신세가 된 것입니다.

 

현묘탑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방이 되고 이제 조국의 품에서 편하게 자리잡으려 했으나 곧이어 터진 6.25 전쟁으로 또 한번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는데 전쟁의 포화 속에서 어느 날 경복궁으로 날아온 포탄 하나가 아무 죄도 없는 현묘탑에 명중되었습니다. 그때의 모습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끔찍했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두경 사진집] [제자리를 떠난 문화재에 관한 보고서 하나]에서 재인용

기록에 의하면 탑의 부서진 조각이 1 2천 개나 되었다고 한다.

 

제자리를 떠나 밧줄에 꽁꽁 묶여 머나먼 이국 땅까지 갔다가 돌아와서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낯선 경복궁 뜰에 서있다가 눈 먼 포탄으로 온 몸이 쪼개지는 아픔을 겪은 현묘탑.

 

1 2천 개의 조각으로 부서진 현묘탑을 복원시킨 것은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혹독한 세월을 예상했듯이 하늘은 우리나라에 뛰어난 문화재 전문가를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한국 고건축계와 수리복원의 선구자인 문화재기술자 임천(林泉, 1908~1965) 선생이 그 입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 춘천 청평사 극락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등을 해제 복원했으며 6.25때 타버린 진주 촉석루의 재건과 서울 남대문도 그가 중수 복원한 것입니다.

 

그는 국립박물관 일원으로 1957년 경복궁 뜰에 처참하게 쓰러진 현묘탑을 남아있는 조각은 붙이고 가루가 되어버린 부분은 원래 돌을 섞어 만든 재질로 복원을 시켜놓아 여러 상처투성이나마 기적적으로 복원에 성공했습니다.

 

그런 현묘탑은 마음의 상처를 한번 더 받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바로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에 맞춰 그 동안 경복궁에서 함께 어울려 지내던 다른 부도와 석등들이 용산 야외전시관으로 전부 이사를 갔지만 부재를 간신히 붙여놓은 현묘탑은 중환자실 환자처럼 절대 안정을 해야 하는 처지라 함께 새집으로 가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근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함께하듯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다치고, 깨지고 그리고 친구들마저 다 떠나버려 외로움에 쓸쓸하여도 이렇게 아직 살아주어서, 이렇게 천 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선사들의 고귀한 정신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몸으로 보여주어 눈물 나게 고맙다고 말입니다.

 

 

 

지광국사 현묘탑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부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품 이전에 지광국사 해린스님의 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다. 해린스님은 왕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요순(堯舜)의 교화로 할 것을 권했고, 도덕정치로 민심을 얻어야 한다고 청원했다. 웅장하고 화려하고 이국적인 정취가 스며들어 있는 현묘탑을 보면 해린 스님이 고려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그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던가를 알 수 있다

출처 : 부석사의 향기
글쓴이 : 월인천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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