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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4대 사화

 

 

조선시대에는 4번에 걸쳐 사화가 일어나는데 사화란 사림의 화란 뜻으로

조선 중기에 사림학파들이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을 말합니다. 

4대 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 을사사화를  말합니다.


*사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림파는 조선시대 정치세력의 하나입니다.

특히 조선 전기 집권세력인 훈구파에 대응하는 세력으로 고려후기 성리학을 학문배경으로 하는

신진 사대부가 등장 하면서 “사족” “사대부” ‘사인“ “사류”와 함께

사림이란 용어가 쓰이게 되었고 쉽게 말해서 곧 지식층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림이란 용어는 정 몽주- 길 재- 김 종직으로 이어지는 신진사대부, 그러니까

고려 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시골로 숨어버렸던 온건파 신진사대부들로 길 재의 제자들 입니다. 조선의 정치가 안정되자 과거 시험을 통해 조정에 등장하고 어느 틈엔가 무시 못할 세력이 되어

훈구파에 도전을 하게 되는데, 사림파가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성종연간에 15c후반에 김 종직- 김 굉필- 정 여창 이 중앙정계에 진출 할 때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림은 향촌질서의 안정을 위해 “유향소”를 설치했으며 “소학” 이라는 책을 가지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 훈구파:

훈구파의 등장은 세조 때부터입니다. 세조는 계유정난의 공신과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신,

그리고 자신의 즉위에 공을 세운 공신 등 134명의 공신을 책정하고 1,2,3,등급에 따라 노비와

토지를 지급하고 후손까지 범죄에 대한 면책권을 주는 등 온갖 특혜를 주게 되는데 이 공신들을 

가리켜 훈구파라고 합니다.

이들은 조정에서 핵심요직에 있으면서 재물과 권력의 축적을 위해 부정부패와 비리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 사화는 연산군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두 번 일어났고

 

중종때 기묘사화 그리고 명종때 을사사화로 많은 사림들이 죽게 됩니다.

 

성군이었던 성종이 죽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성종에 이어 등극한 연산군은 여러분도 익히 아시다시피 학문을 싫어하고 언론을 귀찮게 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림을 배척하고 있던 연산에게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척세력이 불을 붙이게 됩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사화는 주로 세조시대에 형성된 공신과 외척들이 도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세력의 정계 장악을 저지시킨 정치적 사건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4대 사화에 대한 설명.

 

사화란 사림과 훈구파의 대립을 말한다.

● 4대 사화 과정
1.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 연산군 4년)
사초(史草)에 기인하여 발생하였다.

연산군 때 선왕인 성종의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사국을 열었는데,

이 때 당시 사관인 김일손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이 발견되었다.

조의제문은 단종을 항우에게 죽임당한 의제에 비유하여 그 죽음을 슬퍼하고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에 훈구 세력들은 연산군을 꾀어 김일손 등 그 일파를 죽이거나 귀양보내었고 김종직을 부관 참시하였다.


2.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 연산군 10년)
연산군은 사치와 향락적인 생활로 재정이 고갈되자,

훈구 세력들이 가지고 있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려고 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훈구 세력들이 국왕의 행동을 억제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은 이들을 억압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폐비 윤씨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자 연산군은 이에 관련된 많은 선비를 죽였다.

갑자사화는 무오사화처럼 훈구·사림파 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선비가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의미에서 사화이다.

3.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 중종 14년)
중종이 사림의 소장학자 조광조를 내세워 개혁 정치를 실시하였는데,

그는 유교적인 도덕 국가의 건설을 정치적 목표로 세우고 미신 타파(불교와 도교의 통제),

향약의 보급, 소학의 보급, 현량과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이상 국가의 실현 의지로 도리어 중종의 미움을 사게 되고,

위훈 삭제 사건(중종 반정 때 공신으로 추서되었던 인물 중 76명의 공훈을 깎아 버림)으로

위협을 느낀 훈구 세력들이 왕을 움직여 조광조 일파를 몰아내었다.

4.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 명종 즉위년)
이복 형제 간의 왕위 계승 문제로 일어났다.

이는 외척 간의 갈등으로 빚어져 나중에 오른 윤원형(소윤)과 같은 명종의 외척들이

윤임(대윤) 등 전 왕인 인종의 외척을 제거하는데 이 때 윤임을 지원했던 사림들이 타격을 받았다.


[ 분석 및 개요 ]
사화란, 조선 시대 정객이나 선비가 반대파에게 몰리어 큰 화난을 입은 것을 말하는데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약 70여 년 간 거듭되었다.

사화의 동기로 무오사화와 같은 사초 문제를 비롯, 폐비 윤씨 문제 등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사항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직접적인 동기보다는 그 이면의 사회 경제적인 이해 관계의 대립과

이에 따른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더 근본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즉, 농장의 확대 등과 같은 16세기 조선의 사회 경제적 변동 속에서

재지 중소 지주층에 속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이들이 기성 특권 관료층의 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보임에 따라 일어난 마찰이 사화였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당쟁의 전주가 아니라 기성 특권 관료층의 정치 및 폐단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