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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엔 끝이없다.^^*/아는것이 힘

서라벌의 러브 스토리

신라 42대 흥덕왕(?~836)의 순애보......

경주에서 조금 떨어진 안강읍 육통리에는
신라 42대 흥덕왕릉이 울울 창창 빽빽히
소나무 숲에 철옹성 같이 둘러 쌓여 있다.

왕릉의 입구에는 예사롭지 않은,
구렛나루가 선명한 무인상이 서 있으며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서 온
폐르시아인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무역이 서역인 폐르시아에 까지
이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예인데....
이런 무인상은 경주 쾌릉에도 보인다.

당시의 귀족들의 사치로운 생활은 극에 달했다.
당,아라비아에서 수입한 사치품인 비단,양탄자,
유리그릇,귀금속,아라비아산 향료,
동남아산 거북딱지로 만든 장식품,
에메랄드 등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당나라의 유행에 따라 옷을 입었으며,

대표적인 사치 유적으로는 안압지,포석정을 들 수 있다.

사치풍조는 9세기 전반 흥덕왕 시대때 극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사치로운 생활을 금하는 왕명을 내렸지만
실효성은 별로 없을 만큼 통일 신라 후기는
풍요로운 시대였다.

천 삼백년이나 지난 지금도 외제 명품을 좋아라 하고
돈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의 사치는 그떄나
지금이나별반 다를바가 없다.

장보고로 하여금 청혜진을 설치케하고.
당나라에서 가져온 茶 종자를
지리산에다 심게 한 왕이다.

흥덕왕은 소성왕의 딸인 장화 황후가
취임 일년만에 죽자 ....
왕후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시의 왕으로서는 어렵게
11년동안을 독신 으로 보내다.

죽으면서 부인과 합장하라고 유언을 남겨
지금까지 합장묘로 전해온다.

어느해 당나라에 갔던 사신이
앵무새 한쌍을 선물하였는데

다정한 앵무새를 보는것으로
낙을 삼다가 암컷이 먼저 죽어
슬퍼하는 숫컷이 애처로와서

거울을 새장 안에 넣어 주는데
숫컷이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에
암컷인줄 알고 부리를 쫏다가
그만 죽자 자기의 신세와 너무나
비슷하여 장사를 잘 치루 어 주었다는
기록이 삼국 유사에 전한다.

이토록 순애보를 간직한 임금이
신라를 통틀어 유일 하다니
흥덕왕이야 말로 오늘날 남자들이
본 받아야할 선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아니

여자들도 본받아야할 모습인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