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배움엔 끝이없다.^^*/아는것이 힘

죽령재와 죽지랑

죽령재와 죽지랑

 

죽령은 영남 삼대관문 중 하나로 영주와 서울사이에 있는 가장 큰 재이며

우리는 천년동안 아니, 오늘도 이 고개를 쳐다보며 번영과 영화가 있기를 기원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고갯길은 아달라왕 5년 서기 158년 3월에 죽죽이라는 사람이 개설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 되있으나 이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오고 있지 않다.


성덕여왕 11년 서기 642년 대야성 함락시 전사한 죽죽과

484년이라는 긴 세월의 치이가 있으니 동명이인이 분명하다.

촌로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옛날에 이 잿 마루에 죽지랑과 김유신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수년을 두고 찾아 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다만 삼국유사 '효소왕 대 죽지랑'이란 대목의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려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진덕여왕 때 사람으로 술종공이 삭주 도독사(지금의 춘천)가 되어 임지인 춘천으로 가게 되었는데

당시 우리나라에 병란이 있어 기마병 3천으로 호송케 했다.

도독 일행이 죽지령(죽령)에 이르니 한 거사가 잿길을 닦고 있었는데

술종공이 보고 잘 생긴 모습과 하는 일을 칭찬했고

거사 또한 공의 늠름한 모습과 위세 당당함을 좋아하여 서로 마음에 감동되었었다.


공이 춘천 소재지에 부임한지 한 달이 지나서 꿈을 꾸었는데

꿈에 그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꿈을 깨서 부인에게 물으니

꼭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괴상히 여겨 그 이튼날 사람을 보내어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그곳 사람이 말하기를 거사가 죽은지 며칠이 되었다고 하였다.


보낸 사람이 돌아와서 거사가 죽은 것을 보고 하자 날짜를 따져보니 바로 꿈꾸던 날 죽은 것이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마도 거사가 우리집에 태어날 것이다"
라 하고 군사를 보내어 거사를 죽령 북쪽에 장사 지내고

돌로 미륵불을 만들어 그 무덤 앞에 세웠다 한다.

그 후 부인은 과연 꿈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으매 죽지라 하였다.


이 아이가 자라 출세하여 김유신 장군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신무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 득오곡이라는 화랑이 죽지랑을 사모하여 노래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간 봄을 그림에 모든 것이 시름 이로다.

아담하신 모습에 주름살 지시니 눈 돌이킬 사이에 만나 옵게 되오리.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을 길 쑥 구렁에 잘 밤은 있으니"
이와같은 설화는 전생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짓고

이세상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지었다는 김대성의 설화와 상통하는 이야기로

신라 사람들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최근 죽령 젯마루에 두 개의 대나무 모양의 돌 기둥이 있어 옛 사당의 유물인가 했더니,

잿 마루에서 북으로 2킬로 가량 내려가면 보국사라는 신라통일기의 절터가 있는데

그곳에 마루의 돌과 같은 모양의 돌 기둥 두 개와

높이 10미터 가량의 미륵불상이 넘어져 네 동강 나 있고

주위에 많은 석조물의 파손된 돌을 보고

혹시 이곳이 삼국통일 후 죽지랑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전생의 거사의 묘앞에 불사를 일으킨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