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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허난설헌의 유적지를 찾아서...

 

빈녀음(貧女吟)
                                                허난설헌

 

 手把金剪刀(수파금전도)   가위로 싹둑싹둑 옷 마르노라

   夜寒十指直(야한십지직)   추운 밤에 손끝이 호호 불리네.

爲人作嫁衣(위인작가의)   시집살이 길옷은 밤낮이건만

  年年還獨宿(연년환독숙)   이내 몸은 해마다 새우잠인가.

 

 

  「빈녀음」은 조선중기의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의 대표작입니다. 유교사회라 여성은 무시당하던 조선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작문에 대한 천재성은 중국에서까지 인정받습니다. 난설헌의 집안은 아버지 초당 허엽을 비롯한 그녀의 두 오빠 허성, 허봉 그리고 남동생 허균까지, '초당오문장(楚堂五文章)'으로 불릴 만큼 문장에 뛰어난 집안이었습니다. 특히 허균은 홍길동의 저자로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입니다. 요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난설헌」(최문희 作) 이 베스트셀러라서 많은 분이 허난설헌에 대해 궁금하실 거라 생각되는데요. 허난설헌과 관련한 문화재를 소개합니다.

 

 

 

▲ 소설 '난설헌' (사진출처 : yes24)

 

 

 

  허난설헌의 본명은 초희입니다. 그녀는 명종 18년 강릉에서 초당 허엽(1517∼1580)의 3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고려 시대와 달리 조선은 가부장적인 성리학 이념체계 아래 여성들이 설 곳은 점차 좁아졌습니다. 여성은 글을 배우기는커녕 집안일과 대를 잇는 역할만을 잘 해내면 되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허난설헌은 자유로운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초희라는 이름도 가졌을뿐더러, 남성와 동등한 교육을 받을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그녀는 8살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비단 이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는 기생 황진이와 달리 사대부 가문 출신이라는 점, 신사임당과 달리 현모양처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더욱 독특하게 다가옵니다. 오로지 시로써 자신의 이름을 남겼고, 후대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극찬을 받을 만큼 천재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 허난설헌의 생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59호)

강원 강릉시  초당동 475-3

 

허난설헌의 생가입니다.

허난설헌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이 생가는

조선 선조 때 문신이었던 아버지 허엽이 살던 집으로

지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녀는 그리 밝지만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15세 무렵 김성립과 결혼하였으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하였습니다. 가부장적인 가풍의 시댁에서의 삶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남편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아내로서 견뎌내기에 힘들었고, 이 때문에 고된 시집살이를 겪으며 독수공방하기 일쑤였습니다. 또한 아버지가 객사한 뒤, 두 명의 아이를 잃는가 하면, 둘째 오빠 허봉은 귀양을 갔다가 죽었으며, 동생 허균은 정쟁에 휘말려 귀양을 가야 했습니다. 친정의 몰락에 대한 안타까움과 부부 간의 불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 여성에 대한 시대적 억압 등등 그녀의 인생은 우울함의 연속이었습니다.

 

  허난설헌은 이러한 슬픔을 그녀가 가진 재능, 시작(詩作)으로 달랬으며, 그 결과 「유선사」,「곡자시」,「빈녀음」,「봉선화가」 등 200 여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시로써 자신의 죽음을 예언합니다. 그 후,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듯 그녀는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거둡니다.

 

碧海浸瑤海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부용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 허난설헌묘 (경기도 기념물 제90호)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 29-5

 

 

 허난설헌의 묘입니다.

묘비에 적힌 비문은 심악 이숭녕 선생님이 지은 것이에요 ^^

묘에 우측에 시비가 있는데,

시비에는 허난설헌의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습니다.

곡자시는 자식들을 그리워하며 쓴 시인데요,

시의 대상인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묘 좌측에 나란히 있습니다.

 

 

  허난설헌이 남긴 시는 방 한 칸 분량이 될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유언으로 자신이 쓴 시를 모두 태워달라고 부탁합니다. 이 유언에 따라 유작들을 모두 태웠지만, 동생 허균은 누나 허난설헌의 천재성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친정에 남겨놓은 시와 자신이 암송하던 시들을 모아 '난설헌집'을 펴냅니다.

 

  1606년 허균은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에게 '난설헌집'을 보여주게 되는데, 매우 놀라워하며 중국에 가져가서 「허난설헌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중국에서 애송되던 허난설헌의 시는 일본으로까지 전해져 큰 인기를 얻습니다. 

 

 

▲ 난설헌시집목판초간본의 시작부분과 끝부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24호)

강원 강릉시  죽헌동 177-4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

 

허균이 누나 허난설헌의 작품 210여수를 모아 만든 시문집의 모습입니다.

목판으로 간행되었습니다.

책에 간행기록이 없어서 언제 발간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허균의 발문으로 미루어보아

선조 41년(1608)에 간행되었을 거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소설 '난설헌'으로 재탄생한 허난설헌의 일생에 대해 궁금했던 분들! 이 글을 통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으셨는지요? 남성만이 중시되던 시대적 한계에 부딪힌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온 인간 허초희. 비록 27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겨 주었습니다. 그녀의 삶이 녹아든 시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일으켰고 그래서 더욱 사랑받는가 봅니다. 부쩍 쌀쌀해진 늦가을, 책과 함께 허난설헌에게 떠나보는 것은 어떠신가요^^?

 

 

 

▲제3기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최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