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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영주시 정보

부석사 창건설화

부석사의 창건설화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의상 대사의 전기와 부석사의 창건설화가 자세히 전한다.

의상의 속성은 박씨이며 계림부(鷄林府, 지금의 경주) 사람이다.

태어날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남다른 데가 있었는데,

성년이 되어 출가하여 산천에 노닐다가 불도에 들었으며 성품은 매우 천연덕스러웠다.

일찍이 법을 구하러 원효 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러나 국경에 이르러 폭풍이 심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침 길가의 토굴 속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들은 옛 무덤의 해골 사이에 누워 있었다.

하늘은 비로 자욱하고 땅은 질어 이번에는 벽돌 굽는 곳에서 밤을 보내는데

채 밤이 깊어지기도 전에 갑자기 귀신들이 괴변을 부렸다.

원효가 탄식하며 이르기를,
어젯밤에는 토굴 아닌 무덤에서 잠을 자도 편안했었는데 오

늘밤에는 초저녁부터 도깨비굴이 있다 생각하니 탈이 많구나.

 마음먹기에 따라 가지가지의 일이 생기는구나(一切唯心造).

차별하는 생각이 없어지니 토굴이건 무덤이건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먹기 나름이요.

만법이 오직 생각 탓으로 생기는 것이라.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는 것을 무엇 때문에 법을 따로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노라.’
라고 하였다.

이에 원효는 유학을 포기하고 되돌아갔지만,

의상은 굳은 각오로 물러서지 않겠다고 하며 당나라로 향하는 상선(商船)을 탔다.

669년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여 한 신도의 집에 머물렀다.

집 주인은 대사의 뛰어남을 알아보고 머무르게 하였는데,

얼마 후에 고운 옷을 입고 아름답게 화장을 한 선묘(善妙)란 처녀가 사랑을 속삭여 왔다.

그러나 마음이 돌과 같이 굳은 의상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자 도심(道心)을 일으켜 그 앞에서 대원(大願)을 발하여 말하길,
내세에 태어나 스님께 귀명하고 대승을 배우고 익혀 대사를 성취하리다.

제자는 반드시 신도가 되어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을 공급하리다.
라고 하였다.

의상은 그 뒤 장안(長安)의 종남산(終南山)에 가서 지엄 삼장(智嚴三藏) 밑에서 『화엄경』을 배웠다.

대사는 극히 미묘한 도리를 이해하고, 전체의 흐름을 알고 그 행함에 절도가 있고,

요령이 있어 덕의 그릇에 가득 찼다고 할 수가 있고, 가히 삼장의 바다에 기꺼이 노닌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러던중 당나라가 신라를 침범하기위해 준비중이라는 사실을 접하게 되어,

 급히 귀국 날짜를 정하여 등주에 있는 신도 집에 다시 들렀다.

대사는 수년에 걸친 뒷바라지에 감사를 표하고 상선을 타고 귀국하게 되었다.

뒤늦게 대사의 출발을 알게 된 선묘는 대사에게 드릴 법복과 여러 가지 집기를 들고 해안가로 달려갔다. 그러나 대사가 탄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 멀리 가고 있었다.

그녀는 기도를 올려,
내 본래의 참뜻은 법사를 공양하는 데 있습니다.

원컨대 이 의복을 담은 함이 저 배에 날아 들어가기를 기원합니다.

라고 하며 파도 위로 함을 던졌다.

때 마침 거센 질풍이 불더니 함은 새털같이 날라 배 위에 떨어졌다.

선묘는 다시 맹세하기를,
이 몸이 큰 용(龍)으로 변하여 저 배의 선체와 노를 지키는 날개가 되어 대사님이 무사히 본국에 돌아가 법을 전할 수 있게 하리라.
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웃옷을 벗어 던지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정한 원력은 통하는 바가 있는 것이니, 마침내 그녀의 몸은 용이 되어 혹은 약동하고 혹은 굽이치면서 배를 안전하게 이끌어 나갔다.
신라에 도착한 의상에 의해 신라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고

신라 문무왕은 의상의 업적도 기리고 통일된 삼국의 백성도 하나됨을 의미하는 뜻으로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마소가 근접할 수 없는 좋은 터에다가

호국 사찰을 건립하라는 왕명을 내리게 된다.

그 명을 받은 의상은 산천을 두루 찾아 고구려와 백제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았다.

마침내 그곳을 찾았으나 이미 삿된 무리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스님은 혼자 생각하기를,
여기야말로 땅이 신령하고 산이 수려하니 참된 법륜을 돌릴 만한 곳이다. 권종이부의 잡귀 무리들이 오백명씩이나 모여있을 까닭이 무엇이냐.
라고 하였다. 의상은 마음 속 깊이 대화엄의 가르침은 복되고 선한 곳이 아니면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느낀 것이다.

그 때 의상을 항상 따라다니며 지키던 선묘룡(善妙龍)은 대사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허공에서 대변신을 일으켜 커다란 바위로 변했다. 넓이와 깊이가 1리쯤 되는 바위가 되어, 가람의 정상을 덮고 막 떨어질 듯 말 듯 하니 많은 잡귀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사는 사찰을 건립하고 『화엄경』을 펴기 시작하였다.

 겨울에는 햇빛이 있는 낮에, 여름에는 서늘한 저녁에 강설을 하여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

국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전답과 노비를 하사하였으나 대사가 아뢰기를,
내 법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등하게 보고,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없이하여 한가지로 합니다.

『열반경』에는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내 어찌 전답을 소유하고 노비를 소유하겠습니까. 빈도(貧徒)는 법계를 집으로 삼아 발우를 가지고 밭갈이를 하여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의 혜명, 즉 지혜로운 생명이 이 몸을 빌려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대사의 강설(講說)이 심은 나무는 꽃을 피우고, 그가 대화를 통해 이룬 숲은 열매를 맺었다. 대사는 설한 바와 같이 행함을 귀히 여겨 강설하는 일 외에 수련을 부지런히 하였다. 세계와 국토를 장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일이 없었고, 항상 온화하고 서늘하였다. 늘 의정 스님의 더러움을 씻는 법을 실행하여 어떤 종류의 수건도 쓰지를 않았으며, 시간이 되어 마르도록 내 버려 두었다.

또 의복과 병(甁)과 발우(鉢盂)의 세 가지 것 외에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았다. 대개 제자들이 도움을 청하면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가라앉는 때를 기다린 후에 깨우쳐 주었다. 의문나는 점을 술술 풀어서 조금도 찌꺼기가 남지 않게 하였던 것이다. 이후 대사는 정처 없이 구름처럼 떠다니며 마음에 드는 곳이면 어디든지 머물렀다.

이상은  의상 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과정이며 의상대사와 선묘낭자는 아직도 부석사에 살아 남아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전각안 불상쪽에 머리를 두고 꼬리는 앞 마당의 석등쪽에 둔채 땅속에 뭍혀있는 석룡은 선묘의 혼이며 열반에 들기전 짚고 다니시던 지팡이를 댓돌위에 꽃으며

"내가 떠나고 난 다음 이 나무가 살아날 것이다.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나도 살아서 부석사를 지키는 것이고

이 나무가 죽으면 나도 부석사를 떠나는 것이리라" 

라는 말을 남겼는데 신기하게도 이듬해부터 메마른 지팡이에서 싹이 돋아 나더니

가지가 뻗어나고 잎이 피어서 잘 자라더라는 것이다.

그 후 처마 안에 자리한 의상대사의 지팡이 나무는 처마 아래 있기 때문에

비 한방울 맞지 못하고 이슬한점 못 머금은채 1300여년을 한결같이 잘 자라나고 있다.

 

이러하니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는 아직도 진행중이라 할수 있으며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선남선녀들의 기 받음 여행은 의미가 충분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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