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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면면히 이어온 조상들의 삶을 듣다

[五感으로 즐기는 구석구석] 면면히 이어온 조상들의 삶을 듣다

관광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단순한 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뜨겁게 이어온 조상들의 삶을 가슴으로 듣고 싶은 후손들의 열정이다.
 

관광스토리텔링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단순한 이야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뜨겁게 이어온 조상들의 삶을 가슴으로 듣고 싶은 후손들의 열정이다. 스토리텔링만큼 오감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여행도 없다. 이번 호에서는 저마다의 절절한 사연을 가지고 자리 잡았을 경기도의 산성 이야기를 들어본다. 이제 지나온 시간을 보고, 듣고, 가슴으로 느껴보자.

박지영






 

속속들이 사연 품은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24km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해 있으며, 서울을 지키는 외곽의 4대 요새(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 중 하나였다. 

행정구역으로는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에 걸쳐 있으며 성 내부는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속해 있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었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겨졌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 시대의 남한산성은 선조 임금에서 순조 임금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서 그 역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장소였다.

그 중에서 특히 조선 왕조 16대 임금인 인조는 남한산성의 축성과 몽진, 항전이라는 역사의 회오리를 이곳에서 맞고 보낸 바 있다.

인조 2년(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 4년(1626년)에 완공한데 이어,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그 이후 주인을 잃은 남한산성의 문화유산들은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되다가 하나 둘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렇지만 남한산성 주변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 것에서 터만 남아있거나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최근 들어 남한산성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김훈 소설 『남한산성』의 배경지가 되기도 한 이곳은 사적 제 57호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등산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등산을 겸한 봄, 가을의 관광은 성남시를 거치는 남문코스가 좋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을 끼고 있는 동문코스가 좋다.

문의 남한산성도립공원 관리사무소 031-743-6610




 

정조가 사랑한 수원화성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의 축성은 정조의 한과 효심에서 비롯됐다. 1762년 영조 38년 윤 5월 21일 사도세자(장조:고종때 추존)는 당쟁으로 인하여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8일만에 죽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당시 11세였다.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즉위 13년만에 부친의 고혼을 위로키 위해 묘를 양주 땅 배봉산(지금의 서울시 전농동)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을 자신이 이상으로 꿈꾸는 신도시로 건설하고자 정조 18년 정월부터 20년 9월까지에 걸쳐 성곽을 축성했다.

화성은 조선 성곽제도의 최고 완성형이다. 한국 성곽 발달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이 성은 석성과 토성의 장점만을 살려 축성됐으며, 화성 축성에 매달린 선조들은 한국 성곽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국과 서양의 축성술을 본뜨기도 했다. 이 성에 관련된 사항은 ‘화성 성역의궤’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1796년 9월에 완공됐다.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현재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아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 이곳은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공심돈 등이 있다.

문의 화성관리사무소 031-251-4435/4437




 

행주치마가 유래된 행주산성

고양시 덕양산 정상에 축조된 행주산성(사적 제56호)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승명을 포함한 2천3백명으로 왜군 3만 여명을 크게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일어났던 곳이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순찰사로 있던 권율 장군은 이 터에서 3만 왜군을 막아내고 그 여세를 몰아 수원 독산성에 포진하여 서울을 탈환하고자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총 지휘관이 되어 선조 26년(1593년) 2월 11일 승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을 포함한 장병 만 여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진주했다.

이 싸움에서는 우리나라의 전쟁 역사상 처음으로 ‘재주머니 던지기’라는 전법이 쓰였다. 아낙네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덧치마를 만들어 입고는 치마폭에 돌을 주워 담아 싸움을 거들었는데,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성 안에서 백제시대의 기와조각과 토기 등 유물이 많이 나와 아마도 백제 때 처음 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행주산성 내에는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셔놓은 충장사가 자리한다. 원래는 행주나루터 안마을에 정면3칸, 측면1칸의 규모로 행주기공사가 있었으나 6.25사변 때 소실되고 1970년 대대적인 행주산성 정화공사 때 이곳에 다시 짓고, 정자와 문을 세워 경역을 조성했다. 1602년 건립한 행주대첩비가 비각 속에 남아 있으며 1963년에 세운 대첩비도 서 있다. 이 비의 글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썼다. 이곳은 자유로가 개통되고 신행주대교가 완공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져 휴일이면 많은 나들이객들이 찾는 곳이다.

문의 행주산성 관리사무소 031-961-2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