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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안평대군 꿈 속 세상 (몽유 도원도)

꿈(夢)

 <몽유도원도>

  

 

 

 오는 9월부터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전시된다고 한다(장소: 국립중앙박물관). 몽유도원도는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안평대군이 자신이 꾼 꿈을 설명하여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으로 하여금 그려내게 한 것이다. 즉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 속 세상인 것이다. 그 옛날 안평대군이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우리도 볼 수 있다니, 긴 세월을 초월한 안평대군과의 정신적 만남이 몽유도원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룻밤에 꾼 꿈을 화가로 하여금 그리게 하고, 문사들과 시를 지어넣다니, 낭만적이다.

 

 안견 作 몽유도원도

 

시(詩) 서(書) 화(畵)의 만남 몽유도원도

 위 그림이 바로 몽유도원도인데, 안평대군이 30세이던 1447년 4월 20일 그가 도원(桃源)을 노니는 꿈을 꾼 뒤 그 정경을 화가 안견에게 설명했고, 그대로 그리게 하여 3일 후 완성되었다고 한다. 왼편이 현실세계이고 오른편이 도원세계인데, 구도상으로는 부분적으로 독립된 경관을 그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인다. 더구나 현실세계와 달리 도원세계는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것과 같은 방법으로 그려냈다. 그림 뿐 아니라, 안평대군의 표제와 발문을 비롯해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등 스물여명의 당대 최고 문사들의 찬시가 곁들여 있다. 저마다 친필로 쓰여져 있는데, 대체로 안평대군의 글씨체(송설체)와 유사하다는 점에서 당시 유행했던 이 글씨체도 확인할 수 있다. 

 

위 사진은 그림의 구성이 좀 더 잘 보이도록 색 대비 효과를 준 것이다. 표시된 부분이 바로 도원세계이다.

 

           ( 여러 문인의 친필 찬시)                        (안평대군의 발문과 표제)

 

왼쪽 사진에서 보이는 빼곡히 적혀 있는 글씨들이 바로 여러 문인의 친필 찬시이고, 오른쪽 사진에 맨 오른쪽에 휘갈긴 글씨로 夢游桃源圖(몽유도원도)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 바로 안평대군의 것이다. 그리고 찬시와 발문, 표제 그 사이에는 화가 안견의 그림 즉 안평대군의 꿈속 세상이 펼쳐진다.

 

전체 구도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몽유도원도를 통해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안평대군도 만나고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도 만나고 신숙주, 성삼문 등 교과서에서 보던 바로 그 사람들도 만나게 되는 것이다 ! 

 

 

조선 최고의 문예가 안평대군

 세종의 셋째 아들로, 왕자라는 최고의 환경에서 어려서부터 시(詩), 서(書), 화(畵)등 고급문예에 심취할 수 있었다. 문예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세종이 죽은 후에 수양대군에 의해 유린된 단종을 지키고자 김종서, 황보인 등과 함께 수양대군(後 세조)에 맞서지만 단종1년 유배되어 36세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왕자라는 지위가 문예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최고의 지위였으나 동시에 정치적으로 전혀 무관할 수 없다는 필연성으로 결국 그의 문예 활동은 완전한 꽃을 피우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되어 버렸다.

 

 그는 세종대 문예활동의 중심에 있었다. 중국 역대 서화를 널리 수장하여 당대를 대표하는 서화(書畵)수장가 였는데, 그는 이를 안견을 비롯한 화가들에게 제공하는 등 당대 화가를 후원하기도 했다. 글씨 학습을 위한 법서를 간행, 전파시키는 등 서화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그는 계유정난(수양대군→세조)의 화를 입었지만, 그의 글씨는 그 후에도 큰 변함없이 찬미되어, 성종을 비롯하여 조선 왕실의 서풍(書風)에 미친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실제로 성종의 글씨가 안평대군의 것과 닮아서, 중종대에는 성종 어필을 좋아한 중국 사신에게 줄 것을 안평대군의 글씨로 대체하고자 한 바 있어서 그의 글씨가 어필에 버금갈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중종실록에 의하면 '성종어필은 결코 줄 수 없으며 민간에 필시 안평대군의 글씨가 많으리니 그것을 구해주라.' 한 기록이 있는데, 이로 보아 안평대군의 글씨가 거부감 없이 향유되고 있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안평대군, 그의 공간 비해당

 비해당은 안평대군의 여러 호(號)중 하나인데, 세종이 지어준 것이다. 그는 자신의 근거처를 비해당이라 이름 붙이고 그 곳에서 여러 진귀한 수목과 동물을 기르며 여러 문사들과 시회(詩會)를 자주 가졌다고 하는데, 안견 作 몽유도원도에 실은 자신의 발문과 표제, 교류했던 문사들의 시를 통해서도 그곳에서 이루어진 그의 문예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

 

 

 위 사진이 바로 비해당이 있던 자리의 오늘날의 모습이다. 이 곳에 안평대군이 사용하던 정자인 무계정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가운데 바위에 새겨진 무계동(武溪洞)이라는 글씨가 바로 안평대군의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이 곳은 오늘날 서울 종로구 부암동 329-4번지 일대이다. 그 날의 비해당의 모습은 정말 온데 간데 없이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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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견 作 몽유도원도' 라고 적혀 있는 위 그림은 모사도(즉 가짜)이다. 아쉽게도 몽유도원도는 우리나라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지 않다. 어찌된 경로인지는 밝혀진 바 없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해방 전후 우리 나라에서 떠돈 적이 있으나 당시 300만원 정도의 가치를 갖고 있던 몽유도원도는 그만큼의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몽유도원도의 가치는 (금액을 매길 수 없을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굳이 매기자면) 약 10억이 된다고 한다.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일본 덴리 대학에서 소장하고 있고, 우리는 오는 9월에 대여받아 전시를 시작한다. 9월이 되면 안평대군의 꿈(夢)과 안견의 솜씨와 그 세월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비해당(안평대군)은 서화를 사랑하여

누가 조그만 종이, 비단 조각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으면

반드시 후한 값으로 샀으며

"난 이런 것을 좋아하는 성벽이 있는데 이것도 병입니다.

열심히 찾고 널리 찾기를 10여년 한 뒤에야 이만큼 얻었습니다.

아! 물건의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때가 있으며

 모여지고 흩어짐에 운수가 있으니.

오늘의 이름이 다시 내일의 무너짐이 되고

그 모여짐과 흩어짐이 또

어쩔 수 없게 될는지를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다.

 

 

 

 

 

▲ 문화재청 대학생 블로그기자단 김윤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