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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4小門

서울의 4小門



東. 혜화문(惠化門)

      
한양 도성의 동소문이다.
   본래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고 하는데,
   창경궁이 세워지면서 동문의 이름을 '홍화문(弘化門)'     이라고 지어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다보니
   동소문인 혜화문이 북대문의 역할까지 맡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던 문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헐려 없어진 것을 1970년대 후반 서울 도성 복원 사업     때 다시 복원되었다.


   



西. 광희문

  
    한양 도성의 남소문이다.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으며, 도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운구 행렬이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     다고 하여 시구문(屍柩門)이라고도 불렀다.


     1915년에 자연 붕괴되어 아래 부분의 석물 부분만     남아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南. 소의문(昭義門)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다.
   소덕문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       하고 있으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고, 궁궐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北. 창의문(彰義門)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다.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태종 16년(1416)에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     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문을 닫아 두었다가, 중종

   원년(1506)에 다시 열었다고 한다.


    
인조반정(1623) 때는 세검정에서 모의했던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전하며, 창의문의 서쪽 벽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조선시대 도성 문 요약

구분

방위

문 이름

문화
가치

위치

용도

내용

4대문

홍인지문(동대문)

보물1호

종로
6가69

동쪽 관문

  기가 적어 왜구침입이
  잦아 명칭에
산맥의
  뜻 지(之)를 넣다고 함

돈의문(서대문)

 

종로구
신문로2가

중국과의
관문

일제 때 철거

숭례문(남대문)

국보1호

남대문로
4가29

한양의
관문

  궁궐에 직면한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기 위하여 
  현판을 세로로 썼다함

숙정문(북대문)

사적10호

삼청동
산2-1

평상시
닫침

  문을 열어놓으면 음기가
  침범,풍기문란으로 폐쇄

4소문

동북

혜화문(동소문)

성북구
동소문동

양주,포천의
관문

  일제 때 철거후
  1994년 복원

동남

광화문(수구문)

중구
광희동

시신을 성밖으로 내
보내던 통로

  1975년 복원

서남 

소의문(서소문)

중구
서소문

  일제 때 철거

서북

창의문(자하문)

종로구
청운동

북대문 역활

  1958년 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