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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4大門

서울의 4大門과 4小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한양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있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 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의 기본을 갖췄다
.    




              


                     
                          


                  

               서울의 4大門



     
東. 흥인지문(興仁之門)

        
한양 도성의 동대문인 흥인지문(보물 제1호)이다.
    인(仁)은 동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인(仁)'이          붙었다.
                


      다른 문의 이름들과는 다르게 이름이 네자인 것은
    동쪽의 산인 타락산이 산의 지세가 약해 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지(之)'자를 더했다고 한다.
    (옛 한양을 안쪽에서 둘러싼 4개의 산을 內四山이라함.       
동:타락산, 서:인왕산, 남:목멱산, 북:북악산)


  다른 4대문과는 다르게 성문에 옹성을 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西. 돈의문(敦義門)
 
  한양 도성의 서대문(일명 서대문)이다.
'의(義)'는 서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의(義)' 자가 붙었다.  한양 도성의 4대문들 중 가장 많은 수난사를 가진 문이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고 하였는데 태종 13년(1413)에 풍수설을 받아들여 돈의문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고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이라고 불렀다.           


  그 뒤 세종 4년(1422) 도성을 새로 고칠 때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다시 돈의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종 이후 돈의문이 새로 지은 문이라고 하여 새문, 혹은 신문(新門) 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南. 숭례문(崇禮門)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다.
    '예(禮)'는 남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예(禮)' 자가      붙었다.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의 글씨로      유명하다. 물론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주장도 있다.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대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숭례문의 이름에 들어있는 '예(禮)'는 오행 중에서 '화(火)'에 해당되는데, 서울의 남쪽 관악산(서울의 外四山 중 남산에 해당된다.)의 모습이 불꽃 모양이 아닌가?

  거기에 가까이 있는 목멱산(남산의 옛 이름)에는 불에 잘 타는 나무(木)가 들어 있어 이에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얼마 전 방화로 인해 우리 국민들을 가슴아프게 했던 일이 있어 이래저래 불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대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진왜란 때엔 이 현판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몇 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 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것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았다. '훈민정음'과 같은 자랑스러운 문화재가 있음에도
성문을 국보 1호로 지정한 이유 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의 국보가 처음 지정된 것이 일제 때인데,  일제가 과거 임진왜란 때 고니시 군이 한양에 처음 입성한 문이 숭례문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1호로  지정했다는 설도 있으나, 옛 한양의 대문 중에서도 남대문인 숭례문이 정문이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설이 더 힘을 얻고 있다.


  석축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일본의 왕자가 조선을 방문할 때, 성문의 아래쪽을 지나치기 싫다 하여,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 없어졌다고

한다.


                                                                                    

北. 숙정문(肅靖門)

      
한양 도성의 북대문이다.
   본래 북쪽에 해당되는 것은 '지(知)'인데,
   '꾀 정(靖)'자를 사용하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숙정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숙정문도 많은 사연을 가진 문이었다.

   태조 4년(1395)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       (1413)에 최양선이 주장한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     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된다'     는 의견에 따라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혜화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     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는데,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돋우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그것은 숙청문이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북쪽은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숙정문은 다른 대문들과는 규모 면에 있어 그 크기가     현저히 작다. 항상 닫혀 있어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숙정문을 대신하여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했     다고 한다.


     1976년 대통령의 명으로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     할 때 함께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