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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엔 끝이없다.^^*/아는것이 힘

석탑의 전설

 

서쪽의 예천군과 남쪽의 안동시,

그리고 북쪽으로 영주시와 똑같이 15km 간격을 두고 우뚝 솟아 소백산과 대치해 있는 산이 안동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학가산(鶴駕山, 882m)이다.
산세가 학을 타고 노니는 모양을 하고 있어서 학가산이라 이름지어진 이 산에는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국사봉(882m)을 중심으로 그 줄기에 허다한 명당 자리가 포진해 있다.
학가산 남쪽 기슭에 가람을 배치하고 있는 보문사(普門寺)는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창건한 고찰로써,

고려 보조국사의 득도처로 알려져 있다.

고려의 사료를 보관할 만큼 큰절이었으나 왜구들의 침입이 잦아지자 고려 우왕 때 이곳에 보관해 오던 사료를 충주의 개천사(開天寺)로 옮겼다.

그 사료는 조선 건국 이후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를 편수하는 기본 자료로 활용되었다.
또 이 산의 동편 기슭인 석탑리 미림골에는 경북 기념물 36호인 미림동굴이 있다.

모두 9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수십종의 종유석과 석화, 곡석 등 희귀한 생성물이 있어 학술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연석탑인 능인탑 역시 학가산을 대표하는 관심거리다.

이렇다할 기교도 없고 정교한 축성미 따위는 찾아 보기 힘들지만 어떻게 만들어진 탑인지 그 배경을 알고 나면 뭉퉁한 모양새도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축성 동기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그 유래를 설명하자면 영주시 봉황산(818m)에 있는 부석사로 건너가야 한다.

부석사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가장 큰 영향을 끼쳐온 화엄종의 종찰로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그로부터 1천 3백여년동안 화엄종의 맥을 이어오는 곳이다.
당시 부석사는 삼천 승려들이 수도를 하던 대사찰이었다.

새벽이면 삼천명이나 되는 스님들이 목탁을 두들기며 잠자는 미물을 깨우는 의식인 도량석을 행하느라 사찰은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그때쯤이면 공양간의 행자들도 분주했다.

그 많은 수효에 맞춰 나물을 만들고 바릿대와 수저를 일일이 챙기면서도 딸그락 소리 하나 없었으니 공양을 준비하는 절차 역시 수도의 과정이요,

신성한 의식으로 여겼던 것이다.

정성을 다해 올리는 공양은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딱 맞게 준비되었는데 어느날 아침 공양 때 한 스님이 밥 한 그릇이 모자라다고 밥을 청했다.
  “이런! 내가 실수를 다 하다니…”
공양을 올린 행자는 자신의 실수로 간주하고 자기의 몫을 대신 드림으로써 간신히 실수를 무마시켰다.

그런데 저녁때 또 한 그릇이 없어졌고,

이튿날 아침에도 저녁에도 계속 바릿대가 하나씩 없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더 이상 행자의 실수로 묻어 둘 수만은 없었다.
며칠 연이어서 바릿대가 없어지자 공양간에서는 보살이나 행자들이,

그리고 선방에서는 대승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의심하다가 극기야 큰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이를 지켜본 부석사의 큰스님이 말했다.
  “공양 도둑은 부석사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닐세.

저기 남으로 200리 떨어진 학가산에 가면 없어진 바릿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네.”
큰스님의 말을 들은 삼천 명의 대중들은 공양 도둑을 혼내줄 요량으로 학가산으로 몰려갔다.

대중들이 학가산의 북쪽 산등성이에 이르렀을 때 석굴에서 수도를 하고 있던 능인선사가 길을 가로막아 섰다.
  “도둑은 한가지 죄, 잃은 자는 열가지 죄라 하였는데 어찌 너희는 나를 벌하러 왔느냐”
스님들은 분이 치밀어 돌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돌을 던지려고 하는데 능인선사의 준엄한 일갈이 대중들의 귀청을 울렸다.
  “삼천이 공양하는데 바릿대 하나 없어진 것이 돌을 들고 올 만큼 대단하더냐?

그러고도 자비를 추구하는 사문(沙門)이라 칭할 수 있겠느냐?

참 수양인이라면 자기의 공양을 나눠줘야 마땅 하지 않겠는가!”
순간 3천 승려들은 일시에 대오하게 되었다.

그들은 능인선사를 치려고 집어들었던 돌을 한사람씩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것이 쌓여 지금의 능인석탑이 되었다고 한다.
학가산 북쪽 계곡을 가로막고 서 있는 이 석탑은

한쪽 변이 16m에 높이가 15m나 되는 거대한 자연석탑으로

천년의 비바람속에서도 의연하게 그 자태를 지키고 서 있다.

 

대중들을 격분시켰다가 일시에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그것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탑을 쌓도록 한 능인선사는

원력이 능치 않음이 없었던 대사임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그가 10여년간 수도했던 능인굴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줄지 않는 맑은 석간수가 지금도 흘러나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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