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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관련

정조가 사랑한 화성 그곳에서 그를 만나다

 

[사람과 길] 정조가 사랑한 화성, 그곳에서 그를 만나다

모든 새로운 생각은 책상 앞이 아니라 걸으면서 떠오른다는 말이 있다. 시린 겨울이라도 걷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인간은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성장하고, 생산적인 고민을 통해 발전하는 존재니까.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가 사랑해 마지않던 수원 화성(華城)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의 업적을 가까이 느끼며 걷고, 또 걷고 싶었다.



                                                           
글 박지영(여행작가) 사진 한국관광공사 DB, 박지영

 
모든 새로운 생각은 책상 앞이 아니라 걸으면서 떠오른다는 말이 있다
. 시린 겨울이라도 걷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진다. 인간은 끊임없는 사유를 통해 성장하고, 생산적인 고민을 통해 발전하는 존재니까. 조선의 22대 임금, 정조가 사랑해 마지않던 수원 화성(華城)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의 업적을 가까이 느끼며 걷고, 또 걷고 싶었다.

수원으로 가는 길. 겨울의 중심에서 느껴지는 황량함만이 버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시공간을 초월한 듯 성곽이 시야로 들어왔다. 도심의 복잡한 움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하게 풍채를 자랑하는 성곽. 화성이다. 폭설이 내린 후 얼마 지나지 않고 찾은 날, 곳곳에 새하얀 눈이 덮여있다. 맹렬히 기승을 부리는 한파 때문인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아 눈은 세상에 내린 순백의 색 그대로 성곽 곳곳에 흩뿌려 있다. 그곳, 화성에서 정조 임금을 만났다.

조선, 신도시의 탄생
1789년 수원의 객사 앞에 모여든 주민들은 나라에서 전하는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뻤다. 곧 고을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데 현재의 집값과 이사 비용을 나라에서 지원해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해 9월 말경 새 도시에는 관청 건물이 세워졌고, 정조가 와서 머물 행궁이 함께 지어졌다.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당시 조선 최고의 명당이었던 수원부 화산으로 무덤을 옮기려 했다. 무덤 이름도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바뀐다. 현륭원이 구 수원읍의 중심부에 들어서게 되면서 수원은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었는데 옮겨진 곳이 오늘날의 수원이다. 또한 그 이름을 화성이라 불렀다. 그러나 신도시 건설은 단순히 무덤 이전에 따른 결과라기보다는 정조의 치밀한 준비와 목적 아래 이뤄진 사업이다. 화성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가는 큰길을 내기에 알맞았다. 정조는 옛 수원을 산으로 막힌 장소에서 뚫린 장소로 옮김으로써 삼남의 교통중심지며 경제도시로 키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수원의 이점은 이후 현대까지도 이어졌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거쳐 가는 곳으로, 1960년대에는 경기도의 행정 중심지가 되었으며, 1970년 이후 경제 중심지로 떠올랐다. 1990년대에는 전자산업의 중심지로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결과는 200여 년 전 정조의 현명함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정조는 화성의 축성 계획을 정약용에게 맡기고 자신은 화성을 쌓기 전에 먼저 팔달산에 올라가 성을 쌓을 적당한 자리와 화성행궁을 중심으로 도로와 상가, 민가 등이 들어앉을 곳을 살폈다. 화성을 쌓는 데 총책임을 맡은 채제공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빨리 서두르지 말 것. 둘째, 화려하게 하지 말 것, 셋째, 기초를 단단히 쌓을 것 등이었다. 이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건축가들에게도 해당되는 원칙이 아닐까.

 

치밀한 계획 아래 탄생한 화성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의 전체 길이는 5.7km, 면적은 130ha로 동쪽 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되어 있다. 화성을 한눈에 가득 담아 그려 본다. 팔달산 정상에는 서장대가 서 있고, 산기슭을 따라 성벽이 좌우로 이어진다. 성벽에는 일정한 간격마다 각종 시설물들이 갖춰져 있다. 사방의 성문들은 모양도 웅장하고 문 앞에 웅성을 둘러서 더욱 견고한 느낌을 준다. 성문 주변에는 감시용 망루 건물이 높이 자리하고 있다. 수원천이 들어가는 북수문(화홍문)에는 홍예문이 7개 있고, 그 위에는 누각이 세워져 있다.
동쪽으로 가면 사이사이에 포루와 치성이 일정한 간격마다 세워져 있고 중간에는 봉돈도 있어 그 시절 경계가 삼엄했음을 짐작케 한다. 팔달산의 남쪽 기슭으로는 성벽 바깥으로 좁은 길이 이어지고 그 끝에 화양루가 세워져 있다. 팔달산 아래 성안에는 행궁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앞으로는 도시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도로가 지난다.

차차 화성은 타지에서 사람들이 이주해 인구가 늘어났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가옥도 늘어났고, 집의 규모도 예전 구읍 시절에 비해서 커졌다. 치밀한 계획 아래 만들어진 신도시 화성은 분명히 조선시대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혁신적인 것이며 화성만이 갖는 도시의 선진성이기도 했다. 화성은 이제 대도시로 발전할 발판을 마련한 상태였다.
하지만 화성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화성 성곽은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 화성은 왕실을 위한 도시였다. 화성은 왕조 사회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 왕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면 도시 건설 자체에 치명적인 결함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결국 1800년 정조가 갑작스레 죽음을 맞으면서 화성의 번영도 더뎌졌다.

아름다운 화성의 건축물
화성은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벽돌을 병용한 것,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와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구조를 갖춘 점, 용재를 규격화하여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건축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화성을 출입하는 관문은 총 4개. 이중 팔달문과 장안문이 각각 남북의 정문으로서 석축으로 된 무지개문 2층에 문루가 세워져 있고 벽돌로 쌓은 반원형 옹성이 문을 둘러싸고 있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장대는 모두 2개소가 있는데 서장대는 팔달산 정상에서 성 주변을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그 시절 푸르른 나무들 사이로 우뚝 솟은 장대를 상상하니 당시의 기개가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성곽하면 빠질 수 없는 포루(砲樓). 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만든 5개의 포루가 있다. 3층으로 지대 위에 혈석(대포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을 전면 2개, 좌우 3개씩 놓았으며,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하였다. 치성 위에 설치한 누(樓)로 군사들을 숨겨두고 적군이 보지 못하게 하는 시설물인 포루. 아래쪽은 돌로 쌓고 중간 부분부터 벽돌로 축조하였다. 그 위에 집을 짓고 판자를 깔아 문루를 만들고 좌우에는 활을 쏘는 구멍도 만들었다. 수원천과 조화롭게 그 위용을 자랑하는 북수문(화홍문)은 화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의 북쪽에 세운 수문이다. 다양한 기능과 견고함, 그리고 멋진 외관까지 함께 갖춘 북수문은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당대의 대표적 시설물이었다. 화성의 일차적인 목적은 군사적인 목적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자연의 경치와 어우러져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에 신경 쓴 흔적도 보인다. 대표적인 건축물이 각루인데 높은 위치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화성에는 총 4개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중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 불린다.

조선행궁 건축의 백미, 화성행궁
화성을 이야기할 때 행궁은 빠질 수 없다. 임금은 주로 본 궁궐에 머무르며 국사를 주관하지만 본궁을 떠나 지방에 머무르기도 했다. 이때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마련한 곳이 바로 행궁. 조선시대 행궁은 여러 곳에 지어졌다. 그중에는 일시적으로 왕이 지방에 머무르는 경우를 대비한 행궁도 있지만, 화성행궁처럼 왕이 정기적으로 방문하기 위해 지어지는 행궁도 있었다. 화성행궁은 화산의 현륭원을 참배할 때 머무르던 목적 말고도 정조가 양위한 뒤 장차 화성에 내려와 노후를 보낼 계획으로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어떠한 행궁보다도 대규모로 건설되었으며 팔달산 동쪽 기슭 화성의 중앙부에 위치시켰다. 화성 축성 공사와 더불어 증축된 화성행궁은 화성부의 관청과 일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행궁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고 전해진다.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좌익문, 중양문, 봉수당 등의 건물이 동서 방향으로 늘어서 중심축을 이루고, 그 좌우로 여러 건물들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전인 봉수당을 중심으로 혜경궁과 정조가 거처할 건물들이 들어서고, 낙남헌 앞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행사용 건물이 있다. 또한 평상시에는 화성유수부의 관아로 사용하도록 관청건물을 한군데로 모아놓았다. 이러한 건물배치는 궁궐의 정전을 구성하는 일반적인 수법이다.
하지만 화성행궁의 건물들은 18세기의 일반적인 관청의 수준을 넘지 않는 소박한 것이었다. 특히 봉수당과 장락당 같은 건물은 왕이 머무는 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청도 칠하지 않았다. 이는 사치나 화려함을 꺼렸던 정조의 생활 철학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조선행궁 건축의 백미로 불리는 화성행궁, 소박하지만 개혁적이었던 정조를 닮아 있었다.

화성의 즐길거리

200여 년 전의 정조의 업적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빛나고 있다. 화성행궁은 역사 현장으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영화 <왕의 남자>, 드라마 <대장금>, <이산> 등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이처럼 볼거리 많은 화성에서 무엇을 어떻게 즐길까 고민부터 앞선다면 수원의 공식지정 문화관광 상품인 시티투어의 도움을 받아도 좋다. 수원역을 시작으로 화서문과 화성행궁을 지나 KBS드라마센터까지 한 번에 즐길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동력차와 3량의 관광객 탑승차량으로 구성된 화성관광열차를 이용해 화성을 둘러봐도 좋다. 특히 관광객들이 앉는 객차는 임금이 타던 가마를 형상화했다고 하니 과거의 정조 임금이 되어 화성을 둘러보는 기분을 잠깐이나마 느껴보는 것도 좋겠다. 효원의 종 타종 이벤트도 놓치지 말자. 종각은 항시 개방되어 있으며 관광객 스스로 타종하면서 소원을 빌 수 있게 마련됐다.

문의
수원 화성 운영재단
031-251-4435
수원 관광안내소 031-228-4672
장안문 종합관광안내소 031-207-6117

관람료
화성 어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
화성행궁 어른 1,500원, 청소년 1,000원, 어린이 7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