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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엔 끝이없다.^^*/가볼만한 곳

선유도.... 왕릉의 미스테리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나름대로 그 크기와 모습이 다르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그저 같은 파도로 보일 뿐이다.

세상에 태어났다 죽은 사람들은 각각 한 어머니의 아들이며, 아이의 어머니였고 애틋하게 사랑하는 이가 있었겠지만. 선유도에 밀려드는 파도와 같이 그저 같은 모습으로 기억될 뿐이다. 인간의 원초적 고통인 죽음후의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에서 탄생한 것이 거대한 무덤들이다.

 

한 인간이 생전의 영광을 이용하여 사후 내세에 대한 불멸을 바라며 만든 거대한 무덤들은 만든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후손들에게 문화유산으로 혹은 관광상품으로 가치가 있을 뿐이다. 현재까지 군산지역에서 발견된 왕릉은 없지만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은 있는데, 나포 에 이웃한 웅포에서 1982년 발굴된 웅포 입정리고분군 1호 무덤이 그 고분이다.


백제계양식의 굴식돌방무덤형태을 지닌 이 무덤에서는 금동제신발, 금동제관모, 은제말띠, 백제토기, 말재갈 등 왕릉에서나 나오는 부장품이 발견돼 이곳이 백제 22 담로의 한곳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가능케한다. 이렇듯 우리 지역에서도 왕릉규모의 무덤이 발견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왕릉 규모의 무덤을 발견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놀라웁게도 서해에 자리한 선유도이다.

섬에서 무슨 왕릉타령이냐고 놀리겠지만 선유도에 왕릉이 있다는 기록과 기타 증거들은 많이 남아있다. 최초로 선유도 왕릉 기록을 확인 한 것은 『동여비고』라는 고지도 에서였다. 숙종8년(1682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여비고』는 같은 지역이 삼국시대, 고려, 조선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그린 매우 흥미로운 지도이다. 그런데 이지도의 조선시대 군산의 모습에는 이제껏 어느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없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모습이란? 지도상의 군산도(선유도) 에 큰 무덤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왕릉(王陵))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말한다. 같은 지도 익산지역을 보면 선유도의 무덤과 똑같은 두개의 무덤을 그려놓고 쌍릉이라 적고있는데 그곳은 현재에도 익산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 무왕과 선화 공주의 릉으로 추정되는 익산 쌍릉 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볼 때 『동여비고』의 선유도 왕릉기록이 전혀 사실무근의 터무니없는 기록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유도의 왕릉은 과연 존재했던 것일까? 『동여비고』로만 보면 존재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역시 알 수 없는 미스테리이다. 그런데 『동여비고』라는 책의 제목이 동(東)은 동국에서 취하고 여(輿)는 여지승남에서 취하고 비고(備考)는 『동국여지승람』을 이용하는데 참고가 되는 지도라는 뜻이 있음으로 『동국여지승람』에 문헌으로 기록되어 있으리라 추정되어 찾아보니 과연 선유도 왕릉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중종25년1530년) 망경현 산천조에는 “군산도(선유도)는 현의 서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주위가 60리이다. 벼랑에 배를 감출만한 곳이 있어 모든 배들은 이곳에서 순풍을 기다린다.


섬 가운데 마치 왕릉 같은 큰 묘가 있었는데 근세에 이웃 고을 수령이 그 묘를 파내어 금은보화를 많이 얻었다. 이를 사람들이 고발하게 되어 도망하였다 한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글로 보아 선유도에 왕릉 규모의 큰 묘가 있었음이 확실하며 그 무덤이 파헤쳐진 이유와 부장품에 대한 기록들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과거에는 나라가 바뀔지라도 전(前)왕조의 왕릉은 관리해주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였음을 볼 때 선유도의 큰 무덤도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하지만 최근 선유도 답사기간 중 해군기지인 선유도 진과 초기 진 성터등은 확인할 수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왕릉은 확인할 수 없었다.

민속학적 측면에서 선유도에 왕릉이 있었다는 증거는 당산인 오룡묘(五龍廟)에서 찾을 수 있다. 지역의 토속신을 모시는 곳을 내륙에서는 서낭당 혹은 당집 등으로 부르지만 바닷가에서는 오룡당이라 부르는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선유도 에서만 오룡묘 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신성한 당집에 왜 묘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오룡묘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1123년)때 사신으로 왔던 서긍 이 쓴 책인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등장한다. “군산도(선유도)에는 객관인 군산정과 10여 칸의 공해 오룡묘가 있다. 이를 볼 때“『신증동국여지승람』이 쓰여진 당시 이미 선유도에는 오룡묘가 존재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 묘라는 명칭과 선유도에 존재했던 왕릉 규모의 무덤과는 어떤 연광성이 있지 않을까 이러한 의문은 오룡묘에 모셔져 있다가 10여년 전에 분실 당한 신(神)을 그린 그림에서 더욱 강하게 일어난다.

통상 각지역의 당재에는 당산에서 모시는 신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걸어놓는데 이곳 오룡묘에는 다섯장의 토속신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확인할 수 없는 다섯신은 최씨부인, 수문장, 성주, 오구유왕 등인데 앞의 네명의 토속신은 일반무속인도 모시는 평범한 신이지만 오구유왕은 현재 어느 지역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선유도 고유의 토속신으로보인다

그런데 오구유라는 명칭도 특이하지만 왕(王)이라는 호칭은 오룡묘라는 명칭과 함께 선유도에 있었던 왕릉과의 강한 관련 의혹을 갖게다. 혹시 이곳 오룡묘가 본래는 선유도 왕릉의 제사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었으나 후대에 지역 토속신앙과 결합하여 당산의 신으로 모셔지고 별신제의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당연히 선유도에 있었던 왕릉의 주인은 오구유왕 이라는 알 수 없는 이름의 왕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말고 다른 방향에서 선유도 왕릉의 주인을 찾아보자면 단정은 내릴 수 없지만 몇 가지 추정은 가능하다. 먼저 이 왕릉의 주인이 백제나 통일신라의 왕족은 아닐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근거는 선유도가 과거 백제의 영역이었고 백제의 해상활동이 광범위했음은 사실이지만 백제 멸망 당시 금강하구로 공격해온 당나라군의 기록을 보면 군산지역에서의 전투에 관한 내용은 나오지만 선유도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기록으로 보아 조선시대 역시 아닌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결국 이 무덤의 주인은 고려시대 왕씨 일족이 아닐까 생각된다.

고려시대 무덤이라는 근거는 『고려도경』등을 볼 때 당시 선유도가 고려의 외교와 무역의 거점지역 이었다는 것이 첫째 이유이고, 다음으로는 한때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도로 도성을 옮겼으며 모든 백성들에게도 본토를 버리고 서해와 남해의 섬으로 거처를 옮기게 한 후 해상전투에 약한 몽고군에게 끝까지 저항하게 했던 사실 때문이다. 당시 선유도 또한 수많은 육지의 고려인들이 옮겨왔으리라 보인다.

그러나 선유도 왕릉의 주인을 확인하는 가장 심증이 가는 시기는 고려의 대몽항쟁 기간 중 삼별초의 항쟁기간이다. 당시에는 몽고에 항복하여 개경으로 환국한 고려의 왕과 이에 반대하여 끝까지 몽고에 항전한 삼별초군이 받드는 고려왕이라는 두명의 왕이 존재했던 시기로 삼별초군의 활동지역이 강화도, 진도,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 섬 지역이었으므로 선유도 또한 삼별초군의 중요거점지역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때문에 선유도의 왕릉을 이때 삼별초군에 가담한 왕족의 무덤이 아닐까 추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정을 보완해 주듯이 고군산열도의 각 섬에는 고려장(高麗葬)터라는 무덤들이 산재해 있고 십여 년 전에는 전문 도굴범인 호리꾼들이 각 섬의 무덤들을 파헤쳐 수많은 고려청자와 기타 문화재들을 도굴해 갔음을 마을주민들이 증언하고 있다. 이제까지 고군산열도는 우리나라 민속학의 보물이었으나 앞으로는 우리역사의 잊혀진 한 페이지를 찾아 낼 수 있는 보물창고가 되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