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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고장 영주/영주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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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과 온달

신라는 진흥왕12년에 거칠부 등 여덟명의 장수에게 명하여
백제군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니
백제군이 먼저 공격하여 고구려를 격파하였는데
거칠부 등이 이기회를 타서 죽령 밖과 고현안의 10군을 취하였다.

신라는 북진의 속도를 더하여
진흥왕16년(555)에는 진흥왕 자신이 북한산을 순행하여 순수비를 세웠다.
이때에 고구려에서는 실지회복을 위하여
대형 온달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에 빼앗긴 12개군을 수복하려고
아차성아래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온달이 왕에게 고하기를 신라가 우리의 한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부모의 나라를 잊지 못하나이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저를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주시면
나가서 반드시 이를 수복하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떠날때에 맹서하기를
"죽령 이북을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하고 출발하여 신라군과 아차성 아래서 싸우다가
신라군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온달이 아차성 아래에서 죽었는데
그 아차성의 위치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 배자리에 있는 고성이 온달성(일명 아차성)으로 확인 되었다.
그렇다면 온달은 이미 죽령부근까지 진출해 왔다고 보아야 한다.
온달이 출전할 때에 죽령이북을 수복하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던 맹세라든지 단양의 온달성 확인과
온달이 전사한 곳이 죽령부근이라는 설이 타당하다고 본다.

고구려에서는 죽령을 탈환하려고 그 뒤에도 늘 수복의 뜻을 갖고 있었는데
신라 선덕왕11년(642)에 백제와 고구려가 연합하며 당항성을 빼앗아
신라의 당나라와의 교통로를 차단하려고 공격해 왔으며
또한 백제 의자왕은 대야성을 함락시킴에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고구려 원병을 요청하러 갔으나
고구려 왕이 죽령을 돌려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하였다는 것으로도
죽령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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